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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나의 살던 고향 매향리는 미군 전투기 날던 전쟁터였다 ②
 
화성신문 기사입력 :  2024/04/01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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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만규 매향리 지킴이     ©화성신문

1988년 6월 필자는 ‘매향리 청년회’라는 이름으로 발행한 ‘주민에게 드리는 글’ 제하의 숭고한 생존권 회복 운동을 주창하는 유인물을 배포하여 투쟁의 깃발을 치켜올렸다. 그야말로 외세와 군사독재 정권에 의한, 반공과 냉전 이데올로기의 명예를 주민들 스스로가 벗어 던지는 역사적 사건이 터진 것이다.

 

서해안의 작은 갯마을 어부가 세계 최강의 미군을 상대로 전투기 폭격 연습의 지독한 고통에 저항하며 17년간의 평화 찾기 투쟁을 이끌어 온 것이다. 필자는 고향 매향리에서 미군 전투기의 포연을 거둬내고, 매화 향기를 되찾기까지 겪었던 이야기를 본 지면을 통해 아주 짧게 소개하며, 평화의 소중함을 전하려고 한다.

 

매향리 미군기지의 명칭은 쿠니사격장이다. ‘쿠니’는 미국식 발음으로 매향1리의 옛지명 고온리(古溫里)에서 따온 것이다. ‘옛날부터 사람 살기에 따뜻한 마을이다’해서 지어진 천혜의 자연 환경의 ‘고온리(古溫里)’가 미군 조종사들의 파란 눈에는 전투기가 폭격 연습을 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춘 ‘고론리(高鎾里)’로 보인 것이다.

 

쿠니사격장은 동아시아에서 실전과 같은 훈련이 가능한 A급 훈련장으로 미 공군 태평양 사령부 산하 미제 7공군으로 괌, 오키나와, 일본, 태국, 필리핀 등 동아시아 주둔 미 공군 기지에서 발진하는 전투기 조종사들의 폭격 훈련을 평가받는 국제 사격장으로 활용되었다. 

 

1968년 미군 전투기 사격장 확장 조성 공사로 매향리 주민들은 헐값에 강제수용 또는 무상 징발당했으며, 미군 전투기 사격장으로 조성된 후에는 철책을 넘어 미군 기지로 들어가 농사를 지어야 했고, 국방부에 비싼 임대료를 납부해야 하는 소작농으로 전락했다. 

 

1988년 12월 12일 쿠니사격장 점거시위 농성을 시작으로 주민들의 원성이 표출되었다. 특히, 필자가 주도한 쿠니폭격장 점거시위 사건으로 미군 전투기 폭격 훈련이 방해를 받게 되자 미군측은 필자가 경작하는 논과 모판에 모래와 자갈을 퍼붓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로 인한 주민들의 분노는 더욱더 격분해 미군기지를 야간에 습격을 했다. 기습적인 야간 시위는 레이다 장비와 기지 시설물 등을 닥치는 대로 파괴하였고 이는 역 보복사건으로 더욱 격화되었다.

 

그러자 오산 미군 사령부에서 완전히 무장한 미군의 기동 타격대가 헬리콥터로 출동하는가 하면400여명의 경찰이 긴급 투입되는 등 마을 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주민대표 전만규 위원장 등 지도부와 20여명의 주민들을 입건했다.

 

한국 정부는 미 8군 사령부에 사과문을 보냈고, 미군은 시위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제출한 주민들에 한해 미군기지 내 경작 활동을 제한하며 보복 조치를 이어갔다.

 

위 사건 이후로도 크고 작은 오폭 및 불발탄에 의한 인명 및 재산 피해로 주민들은 미군기지 정문 앞에서 천막 시위 농성을 벌이며 근본적인 대책을 지속적으로 요구했다. 

 

그 결과 한미 배상심의위원회로부터 수백 가구 주택 파손의 수리비  일부(95년 당시 3억 5000만원)를 지급받았다.

 

그러다가 2000년 5월 8일 훈련 중이던 미군 전투기(A-10)가 엔진 고장으로 인한 오폭(500파운드 폭탄 6기) 사고가 발생하였고, 이 사건으로 주민 6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수백 가구가 파손되었다.  

 

그러나 한미합동조사단은 6월 1일 국방부 기자 회견장에서 “5월 8일 오폭 사건으로 인한 그 어떠한 피해도 발견하지 못했다”며 매향리 주민들과 전 국민을 얕잡아 보며 대국민을 기만했다.

 

이때, 필자는 주민대책위원장으로 한미합동조사단의 기자회견을 반박하는 현장  기자회견을 마친 직후 미군기지 철책을 넘어 뛰어 들어가 우리 매향리 주민들에게 압제의 상징이던 주황색 깃발(미군 전투기 사격 깃발)을 찢으며, 대내외에 제2의  매향리 대투쟁을 선포했다. 필자는 현장에서 바로 사복 경찰들에게 체포되고 구속기소 되었지만, 그날 국내외에 방송된 매향리 대투쟁의 선포 기자회견은 국내외적인 굵은 민중연대 투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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