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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국으로 치닫고 있는 동탄 신도시의 공교육 무엇이 문제인가(4)
낯선 타인과 관계맺기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정현주 동탄교육특위원장 기사입력 :  2008/11/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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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를 보는 또 다른 관점 몇 가지

 


본격적으로 실타래처럼 얽혀있는 임대 아파트의 기피현상이라는 난제를 언급하기 전에 몇몇 사람들의 눈과 귀를 빌려 아파트를 정의해 보고자 한다.

소설가 이외수는 아파트를 ‘인간 보관용 콘크리트 캐비넷’이라고 정의했고, 미술 평론가 강홍구는 ‘모든 아파트에는 분노와 공포가 창문처럼 매달려 있다.’라는 시적인 표현을 빌려 아파트를 정의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프랑스의 지리학자 발레리 줄레조는 우리나라의 아파트 풍경을 보고 놀란 나머지 아파트의 역사, 구조 등 주민들의 세부적인 삶을 조명하면서 [아파트 공화국]이라는 책까지 발간했다.

이들의 눈에 보이는 아파트의 공통점은 한결같이 부정적이며 풍자적이다.

 


정책적으로 반영되고 있는 임대 아파트의 기피 현상

 


임대기피 현상은 신도시를 개발하면서 시작됐다.

초기에 보였던 임대기피현상은 차라리 순진했으며 적어도 도덕성이라는 페르소나를 벗어던지지는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아파트의 획일성만큼이나 사람들의 생각도 획일화됐고, 차별과 구분짓기의 기준은 오로지 경제적 가치 하나로 환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인간과 사회에 대한 가치규범도 거추장스러운 악세사리가 된지 오래이고, 경제적 가치를 위협하는 어떠한 상황도 절대적으로 용납할 수 없다는 페르소나를 벗어던진 사람들의 생얼이 한국 사회에 전면적으로 등장했으며 이젠 주류로 자리를 잡아가는 조짐이 보인다. 사회를 위협할 만한 수준이다.

필자가 위험수준에 도달했다고 판단하는 근거는 임대기피 현상이 단순히 현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정책적으로 고려되고 적극 반영되는 수준으로까지 발전했기 때문이다.

얼마 전 서울시 교육감 선거에서 공정택 후보는 “임대아파트를 지으면 저소득층 아이들이 많아져 교육환경이 나빠질 수 있다”며, 임대 아파트 건설 사업에 대해 재고를 요청한 적이 있었다.

비록 공정택 후보의 행위는 비난을 받으며 철회 됐지만 이는 한국 사회가 빈부격차에 따라 정책적으로 양극화를 고착시키려는 시도로써 시사하는 바가 큰 문제였다.

 


동탄도 예외일 수 없는 임대아파트 기피 현상


임대기피 문제는 동탄의 학교설립 과정에서도 여지 없이 나타났다. 여러 가지 명분을 앞세우기는 했지만 본질적으로 임대 아이들과 한 학교에 보낼 수 없다는 모단지의 집단 민원이 이어졌고,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시교육청은 이를 정책적으로 반영했으며 집단 민원은 울고 싶었던 시교육청의 뺨 한 대를 때려 준 형국이 됐고, 결국 학교설립을 취소하게 되는 원인을 제공했다.

이로써 파국으로 치닫고 있는 동탄의 학교문제를 해결하기는 더욱 요원해진 셈이 됐다. 임대 아이들과 한 학교에 다닐 수 없다는 집단 민원을 수용하고 정책적으로 반영한 시교육청의 도덕적 타락도 반드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보이지 않는 수면 아래서 비공식적으로 존재하던 카스트를 더욱 강화하는 데 일조한 시교육청의 행태에서 차별받지 않고 평등하게 교육받을 권리, 사회적 기본권은 어디에서 없었다.

 


상대적 기준으로 가치를 평가하는 서글픈 자화상


사람들은 묻는다. “너, 몇 평 사니?” “어디 사니?”

이 말은 곧 바로 구별짓기의 시작이 되고 가차 없이 몇 평짜리 인생으로 낙인 찍는 기준이 됐다.

그러나 이러한 상대적 기준으로 타인을 구별짓는 것이 얼마나 서글픈 일인가? 같은 단지 내에서도 평수에 따라 서열화되고, 부의 상징 타워 팰리스 안에서도 평수에 따라 차별이 이루워지는 웃지 못할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절대적 기준이 가차 없이 폐기된 아파트는 사막으로 변한 지 오래이다.


아파트의 획일성만큼이나 사람들도 규격에 따라 서열화되는 사회는 ‘인간 보관용 콘크리트 캐비넷’ 이라는 정의처럼 인간이 생명력을 잃고 하나의 사물로 전락한 단면을 날카롭게 풍자한 것이다.

같은 평수라도 임대는 민간 분양자들 앞에서 고개를 숙여야하고, 40평은 50평 앞에서 기죽고 낙인 찍혀야한다.

그렇다면 강남의 타워 팰리스의 가장 넓은 평수에 사는 사람도 빌케이츠 앞에 서면 존재감조차 확인 받지 못할 상황이 돼야 하는가. 나와 타인이 물고 물리는 상대적 평가는 그래서 서글픈 우리의 자화상이다.


좁은 평수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경멸, 나보다 넓은 평수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시기심과 모멸감, 더 넓은 평수로 옮겨 타야한다는 욕망, 아파트로 경제적 가치를 높여야한다는 강박증들로 인해 ‘모든 아파트에는 분노와 공포가 창문처럼 매달려 있다.’는 말에 반박할 수가 없는 것이다.

임대이거나 좁은 평수에 한해서만이 아니라 ‘모든 아파트’에 분노와 공포가 서려있는 것이다.

 


아파트는 창의력을 말살하는 공간

 

교육학자들이나 환경주의자들이 대하는 아파트는 골치덩어리이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아파트가 아이들의 창의성을 말살한다고 주장한다.

아이들은 규격화된 사각형 안에서, 비슷한 평수, 똑같은 인테리어를 보고, 비슷한 경제력을 지닌 주위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보면서 자신도 그와 같지 못하면 불안해지고, 시간이 지나면서 사고력도 규격화되어 다양성과 창의력이 요구되는 상황에 적응하지 못한다.

민간 분양 아파트에 사는 부모들은 걱정한다. 자신의 아이가 임대 아이들과 같은 학교에 다니면 무언가 비교육적인 환경에 노출된다고 생각하고 같은 학교에 다니지 못하게 하려고 결사적이다.

그러나 진화론에서 종의 다양성이 자연을 건강하게 유지 시킨다고 증명했듯 인간 관계도 이에 적용해 볼 수 있다.

다양한 사람들과 접촉하고 다양한 상황에 노출되어 사는 사람은 현실에 대처하는 능력이나 위기의 상황에서 순발력을 발휘한다.

아이들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학교는 인간의 삶을 이해하고 관계를 맺는 첫 무대이다.

필자의 경험담을 풀어보자면 동탄에 이주하기 전에 모 지역의 변방에 있는 분교로 아이들을 보냈었다. 그 곳은 임대 아파트보다 훨씬 못한 환경에서 생활하는 아이들이 있었다.

대부분 결손 가정의 아이들과 친구 관계가 형성 됐고, 생활공간도 형편이 없었다. 크고 작은 사건들이 있었지만 우리 아이들은 부모가 이혼한 친구의 아픔, 자신보다 못한 환경에 사는 친구들에 대한 안쓰러운 마음, 빈부격차에 따른 생활의 어려움, 장애아를 왜 배려해야하는지 등을 단지 머리로 이해하는 수준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이해해 갔다.

삶의 다양성을 이해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은 부모가 해 줄 수 있는 훌륭한 교육의 장이기도 하다.

 


사막에서 낯선 타인과 관계 맺기

 


사막은 생텍쥐베리와 어린왕자가 만났던 공간이다. 그러나 그들이 만났던 사막은 사막이 아니다. 왜냐면 어린왕자는 단 번에 생텍쥐베리가 그린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을 알아보고 진정성을 가지고 만남이 이루워진 공간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관계맺기란 상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한 상태에서 가능하다. 둘 중 한 사람이 숫자와 권위, 지식, 경제적 가치 따위만을 말했다면 진정한 만남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악착스럽게 임대를 밀어내려하고 이를 제도화하려는 시점에서 필요한 것은 성찰이고 반성이다.

아파트라는 사물이 지니는 경제적 가치에 앞서 인간을 먼저 보자는 것이다. 진정한 관계맺기가 단절된 아파트라는 공간은 사막이다. 민간 아파트에 살면서 수천만원씩 빌리고 다달이 이자를 내며 사는 사람들이 단지 임대라는 이유 하나로 선을 긋고, 강제로 관계를 단절시키려고 하는 것은 자기 기만이다.

내가 살고 있는 공간만이라도 창문처럼 매달려 있는 분노와 공포를 거두워야하지 않겠는가. 마지막으로 생텍쥐 베리의 말로 글을 매듭짓고자 한다.

“고립된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상호 관계로 맺어진 매듭이요, 거미줄이며, 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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