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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김명철 시인의 현실과 상상의 교차로]
인간의 영혼과 AI의 영혼
 
화성신문 기사입력 :  2024/03/25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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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명철 시인, 화성작가회의 회장     ©화성신문

2016년 3월이었다. 대학 이과생들을 대상으로 인문학적 글쓰기 강의를 하러 가는 버스 안, 알파고가 세계 최고의 바둑 고수인 이세돌 9단을 꺾었다는 뉴스가 전해졌다. 충격이었다. 인간이 입력한 프로그램에 인간이 당했다는 것이 믿어지질 않았다. 인간지능의 피조물인 인공지능이 인간을 능가하다니. 

 

그날 수업은 예정에 없던 알파고에 대한 토론 과정을 거쳐 진행됐다. 인공지능 AI가 과연 어디까지 발전할 수 있겠는가에 대해 나와 학생들은 열띤 토론을 벌였다. 자연스럽게 두 패로 갈렸다. 언젠가는 인공지능이 인간을 지배할 날이 도래할 것이라는 주장과 그렇게 되지 않도록 영악한 인간이 미리 인공지능의 프로그램을 바꿀 것이라는 주장이 팽팽했다. 난 후자의 편이었다.

 

그런데 전자의 주장, 즉 인공지능이 인간을 지배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는 논리 중 하나에 우리 편이 쩔쩔매게 되었다. 그 논리는 이런 것이었다. ‘인간은 끊임없이 진화를 거듭하여 현재의 몸과 지능을 갖추게 되었다. 인간이 인공지능에 입력하는 데이터나 프로그램 등은 고도의 알고리즘을 필요로 한다. 이 알고리즘을 통해 수많은 데이터가 정리되어야 한다. 그 정리는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인공지능은 단순한 정보 저장소가 아니다. 인공지능은 데이터의 우선순위를 결정할 만큼 발전했다. 인공지능은 인간의 지능을 모방한 것이기에 인간의 지능을 따라서 학습할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인공지능은 인간의 도움 없이 자기 스스로 진화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 인공지능이 자가 생성적으로 진화해 나간다면 인간이 그것을 감당해낼 수 없을 것이라는 논리였다. 이 논리는 우리 편을 몹시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그때 나는 ‘만약 AI가 진화하여 시까지 쓸 수 있다면? 시인인 나보다 시를 더 잘 쓴다면?’ 그때 사실 난 내심 속이 많이 거북했었다. 

 

최근에 생성형 AI인 챗GPT(Generative Pre-trained Transformer)가 쓴 시에 ‘나무가 새로운 노래를 한다’라는 표현이 있다. ‘새로운’이라는 단어가 상식적으로 ‘이전에는 없던 것’을 의미한다면, 나는 챗봇을 따라갈 수가 없을 것이다. 그 녀석이 나보다 과거에 대한 정보를 백 배 천 배 많이 알고 있을 테니까. 그러나 새롭다는 것이 늘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니 내가 그것에 꿀릴 일은 아닌 것 같다.

 

그리고 입도 없는 나무가 노래를 한다는 것은 상상적 표현이라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사실 사실(事實)에 가까운 상상이다. 중딩이나 고딩 생물 교과서에도 나오는 내용이지만, 약 40억 년 전 원시지구의 상태에서, 탄소나 수소나 질소 등과 같은 무기물질들이 우연적 조합에 의해 코아세르베이트라는 유기체가 생성되었다는 학설이 있다. 그런데 그때 출현한 아메바 같은 단세포 생물 유전자의 80%가 현재 우리에게 유전되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런 상상을 해볼 수가 있을 것이다. ‘지구 최초 생명체의 DNA가 지금까지 우리에게 이어져 왔다.

 

그러니까 그 유전자는 고생대와 공룡의 시대인 중생대를 거쳐 현생 인류인 우리에게까지 전해져 왔다. 지금 우리에게 하늘을 날고 싶다는 염원이 있다면 그 염원은 조류의 조상인 익룡(翼龍)의 알에서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상상력은 무기물질로 만들어진 챗봇을 따라갈 수가 없을 것이다. 광대한 시간과 광활한 공간의 영역을 아우르는 무기물질로서의 챗봇은 나의 상상력을 천 배 만 배 능가할 테니까. 그러나 상상의 세계라는 것도 늘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니 그런 면에서도 내가 그렇게 꿀릴 일은 아닌 것 같다.

 

AI 인형이 오래전부터 독거노인들의 말동무가 되어주고 있다고 한다. 그런 인형들이 없으면 노인들이 이제는 못 살 것 같다고도 한다. 또한 인간의 것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부드러운 피부를 지니고 36.9도의 체온으로 성적 욕구를 채워주는 인형도 있다고 한다. 하아 참,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어쩌면 조만간 나보다도 더 인간적인 인형이 출현해 불쌍한 나를 보고 눈물까지 흘려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인간적이라는 것이 곧이곧대로 사실 인간도 아니고, 또한 나는 시인으로서의 풍부한 감성도 지니고 있으니 내가 그런 인형들에도 주눅들 만큼 꿀릴 일은 아닐 것이다.

 

얼마 전 라스베이거스에서 국제 전자제품 박람회인 CES2024라는 행사가 열렸다. 각국 회사들은 디지털 유토피아를 표방하면서, ‘인간을 위한 AI’라는 슬로건으로 전시장을 가득 채웠다고 한다. AI가 따듯한 미래를 보장해 줄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AI에 대하여 부정적인 견해들도 많지만, 나는 그들의 말을 믿고 싶다. 그리고 사실 못 믿을 것도 없다. AI를 구성하는 물질들도 어쩌면 처음에는 우리와 하나였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가지 강한 의문이 남는다. 영혼이 있는 우리는 ‘날개’에 대한 동경을 갖고 있는데 그 이유를 챗봇이 알까. 챗봇이 ‘나무가 새로운 노래를 부른다’는 시를 썼다고 했는데, 그렇게 노래를 부르는 나무의 속내를 그것이 알까. 2년이 다 되어 가도록 내내 얼어 터져 있었던 우리를 위해, 맨땅에 떨어져 있던 우리의 날개를 위해, 그것 때문에 나무가 노래를 부른다는 사실을 챗봇이 알까. 세상 일이 하도 답답해서 질식해 죽을 것만 같았던 우리를 위해, 나무가 새로운 노래를 부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고체 물질 덩어리 챗봇이, 과연 알아챌 수 있을까. 

 

 

김명철             

2006년 <실천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짧게, 카운터펀치’, ‘바람의 기원’, ‘우리는 바람의 얼굴을 꽃이라 하고 싶다’ 등이 있으며, 소설집으로 ‘백석-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등이 있다. 현재 화성작가회의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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