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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호 교수의 Leadership Inside 286]
인생을 바꾼 사람은 무엇이 다른가?
 
화성신문 기사입력 :  2024/02/26 [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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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영호 아주대학교 명예 교수     ©화성신문

돌이켜 보면, 1994년은 세계화라는 개념이 뜨거운 화두가 된 해였다. 1993년 2월 25일 제14대 대통령에 취임한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 초부터 신속하게 개혁과 부패 일신 정책을 펼쳐나갔다. 군의 사조직인 하나회를 해체하고 금융실명제 도입을 추진했다. 그러나 김영삼 대통령은 이런 과거청산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보다 전향적인 비전을 내세우고 싶었다. 그때 등장한 것이 세계화였다. 마침 세계는 미국 주도로 개방화의 물결이 세차게 밀어닥치고 있었다.

 

1994년 11월 호주를 방문한 김영삼 대통령이 시드니에서 ‘세계화’를 국정 과제로 발표했으며, 선진국 모임이라고 할 수 있는 OECD 가입을 추진하게 되었다. 그러나, 세계화는 논란이 많은 정책이었다. 우리나라가 세계화를 추진하고 OECD에 가입하게 되면, 상품시장뿐만 아니라, 외환과 자본시장까지 개방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문제를 두고 1994년과 1995년은 아주 시끄러웠다.

 

그때 필자는 책방에서 우연히 책 한 권을 발견하게 되었다. 제목이 ‘세계 최고를 향하여’라는 책이었다. 혹시나 사회적으로 화두가 되어 있는 세계화에 대한 해답이 있지나 않을까 해서 책을 집어 들었다. 경제학자나 정치학자가 쓴 거대 담론이 아니었다. 전남 곡성에 있는 금호타이어 공장에 근무하는 한 생산 반장이 자신이 회사에서 펼친 혁신 사례를 진솔하게 담은 이야기였다. 서점에서 책장을 넘겨보던 필자는 순간 이 책에 매료되고 말았다. “세계화가 뭐 별것일까? 우리 국민이 이런 마인드로 일을 하는 것이 바로 세계화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필자는 책을 숙독하고 저자인 윤생진 씨를 찾았다. 그를 아주대학교 최고경영자 과정 강사로 모셨다. 강의는 통상 저녁 6시 반부터 8시까지 90분이었다. 하지만 그날은 6시 반부터 8시 반까지 2시간 동안 중간에 화장실 가는 시간도 갖지 않고 수강생들은 100% 강의에 몰입하였으며 끝나고 모두 기립 박수까지 쳤다.

 

윤생진 씨는 흑산도의 어부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많이 배우지는 못했지만, 항상 윤생진 씨에게 “뼈대가 있는 가문의 명예를 생각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했다.” 그러나 사춘기 윤생진은 그런 아버지 말을 들을 때마다 반항심이 생겼고, 공부보다는 노는 것에 정신이 팔렸다. 군대를 제대한 후 철이 들었는데 아버지는 세상을 뜨고 홀어머니를 모시게 되었다. 좋은 회사에 취직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준비하여 다행히 금호타이어에 입사했다. 그리고 회사에서 상을 받아 인정받고 싶었다. 그래서 제안을 열심히 하여 제안상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1984년 금호그룹에서 가장 제안을 많이 하여 제안왕에 선정이 되었다. 하루에 7건 정도 제안을 했다. 보통 사람은 한 달에 한 건도 하기 어려운데 말이다. 그는 그다음 해에도 연속으로 제안왕이 되었고, 1988년에는 능률협회가 한국 제안왕상을 제정했는데 그가 제1회 전국 제안왕이 되었다. 그는 품질명장에도  선정되었다. 

 

타이어 완제품을 성형하는 가류기라는 기계가 있는데 이는 전량 일본에서 수입했었다. 일본에서 만든 것이니 누구 하나 그 성능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 기계에 윤생진 씨는 도전했다. “일본 기계라고 해서 결점이 없을 리가 있나?” 그는 끝까지 파고들어 공정을 10초 단축시켰다. 그 덕분에 회사는 연간 20억원을 벌 수 있었다. 들어간 비용은 단돈 12만원이었다. 윤생진 씨의 제안은 이런 식으로 다방면에 걸쳐 있었다. 

 

그런 그였지만, 그는 고졸 생산직이었다. 기껏해야 대리도 되지 못하고 반장으로 은퇴해야 하는 생산직이었던 것이다. 그때 필자가 금호그룹 미래 50년을 설계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었다. 금호그룹은 1946년에 광주에서 택시회사로 출발했기 때문에 1996년이면 50주년을 맞게 되었다. 1995년 그룹의 임원들 워크숍이 있었다. 필자는 인력관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윤생진 씨 이야기를 꺼냈다. “이런 훌륭한 사원이 고졸이라는 이유로 승진을 못하면 되겠는가?”라고 문제를 제기하고 ‘명예공장장’ 제도라도 만들어 이들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맨 앞줄에는 박성용 당시 금호그룹 회장이 앉아 있었다. 그는 필자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고 메모하고 계셨다. 그 후 큰 사단이 일어났다. 윤생진을 대리, 과장을 건너뛰고 차장으로 특진시킨 것이다. 그러고는 서울 회장 부속실에서 근무하게 했다. 파격 중 파격이었다. 윤생진 씨는 서울에 와서도 하는 일마다 열정적으로 했고, 하는 일마다 1등이었다. 그는 고속으로 임원이 되었으며, 상무, 전무 뺏지도 고속으로 달았다.

 

그런 그가 금년 2월 73세의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떴다. 그는 마지막까지 신에너지 개발에 몰입하고 있었다. 그는 항상 연구하고 공부했다. 언제나 어디서나 개선 과제는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무엇을 하든지 최고가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게 그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choyho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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