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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읽는 화성 2] 병점을 노래한 두 편의 시
 
화성신문 기사입력 :  2023/07/03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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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휘민 시인/ 화성작가회의 사무국장

화성에서 살아보기 전까지 나에게 화성은 간이역의 이미지로만 다가왔다. 오산과 수원 사이 넓은 들판 한가운데 들어선 작은 역사에는 기차가 서지 않았다. 하지만 ‘병점(餠店)’이라는 이름은 오랫동안 잊히지 않았다. 동네 이름이 ‘떡 가게’라고 하며 웃었던 기억이 난다. 이 지역이 예전부터 서울로 이어진 교통의 요충지였고, 행인의 왕래가 잦아 떡전거리가 형성되었다는 유래를 알게 된 건 한참 뒤의 일이다. 그렇다면 시 속에서 병점은 어떤 모습으로 등장할까. 

 

 

화성이나 오산으로 가는 갈림길에/ 병점은 엉거주춤 서 있다./ 어디로든 숨지 못해 불빛 꺼진/ 통닭집 생맥주집 입간판 뒤로 숨는다./ 흐린 구름 올려다보며 구름 속으로/ 솟구칠까 말까? 얼핏 얼굴을 찡그린다./ 끊긴 지 오래인 녹슨 선로 곁에/ 제 이름 지운 새파란 풀들이/ 서로 포갠 팔들을 풀지 않는다./ 멀리 오리나무 숲 한 채가 자주 몸을 뒤채며 꿈틀거린다./ 그 곁에서 시간을 가볍게 뒤채는지/ 종이 구겨지는 소리를 낸다./ 비가 올려나?/ 지나는 노인이 중얼거린다./ 불빛 흐릿한 차량들의 꼬리가 사라지고/ 글씨가 거꾸로 걸린 정류장 팻말이/ 남몰래 바람에 건들거린다./ 기다림이란 언제나 지루하거든./ 병점이 힐끗 돌아다본다. - 노향림, 「흐린 날의 병점」 전문

 

  

인용한 시의 화자에게 병점은 ‘갈림길’에 ‘엉거주춤 서 있는’ 장소로 인식된다. ‘불빛 꺼진’‘통닭집 생맥주집”이 있는 이곳은 ‘끊긴 지 오래인 녹슨 선로’와 ‘제 이름 지운 새파란 풀들’과 어우러지면서 허름하고 낡은 소읍의 이미지를 구축한다. 대상을 의인화하긴 했지만 시적 화자의 위치는 관찰자에 고정되어 있다. 그래서 시인은 감정을 배제한 상태에서 화자의 눈에 비친 병점의 풍경만 제시한다. 그러다가 시의 후반부에서 ‘노인’과 ‘종이 구겨지는 소리’로 ‘시간’의 이미지를 감각적으로 환기하고는 ‘기다림’에 대한 소회로 시를 마무리한다. 이제 우리는 이 시가 거리 산책자 혹은 여행자의 시선으로 쓰여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곳이 고향이라면 시인은 어떻게 병점을 그려낼까.

 

병점엔 조그만 기차역 있다 검은 자갈돌 밟고 철도원 아버지 걸어오신다 철길 가에 맨드라미 있었다 어디서 얼룩 수탉 울었다 병점엔 떡집 있었다 우리 어머니 날 배고 입덧 심할 때 병점 떡집서 떡 한 점 떼어 먹었다 머리에 인 콩 한 자루 내려놓고 또 한 점 떼어 먹었다 내 살은 병점 떡 한 점이다 병점은 내 살점이다 병점 철길 가에 맨드라미는 나다 내 언니다 내 동생이다 새마을 특급 열차가 지나갈 때 꾀죄죄한 맨드라미 깜짝 놀라 자빠졌다 지금 병점엔 떡집 없다 우리 언니는 죽었고 수원(水原), 오산(烏山), 정남(正南)으로 가는 길은 여기서 헤어져 끝없이 간다 - 최정례, 「병점(餠店)」 전문

 

 

최정례 시인의 「병점(餠店)」은 짧게 툭툭 치고 나가는 단문이 매력적인 작품이다. 노향림 시인이 묘사를 통해 ‘흐린 날의 병점’의 이미지를 형상화한다면, 최정례 시인은 속도감 있게 전개되는 서술을 통해 화자와 그의 가족이 지나온 삶의 내력을 병점이라는 장소와 겹쳐 놓는다. 이로써 우리는 이 짧은 시 속에서 화자의 아버지가 철도원이었고, 어머니가 화자를 배고 입덧이 심할 때 병점에서 떡을 사먹었으며, 화자에게 언니와 동생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화자는 ‘병점은 내 살점이다’라고 선언함으로써 자신과 고향의 정체성을 일치시킨다. 그런데 후반부에 반전이 있다. 

 

‘지금 병점엔 떡집’이 없고, ‘언니는 죽었’다. 자신의 ‘살’과도 같던 ‘떡집’이 사라짐으로써 화자의 정체성은 부정되고, 언니의 부재는 고향에 대한 상실감을 배가시킨다. 이로써 인식과 경험의 주체인 화자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만들어졌던 병점의 장소 정체성은 사라지고 ‘병점’이라는 기호만 남는다. 그리고 이 시를 쓴 최정례 시인도 2021년 세상을 떠났다. ‘이제 그 누가 있어 병점을 노래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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