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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시 문화예술 첨병을 찾아서-정선영 도예가]
호기심과 모험심 강한 도예 탐험가
흙과 유약과 불의 조화로 빚어내는 신비로움
 
신호연 기자 기사입력 :  2023/06/05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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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성신문

 

▲ 진사달항아리(불로 그리다)  © 화성신문

45년간 오롯이 도예가의 길을 걸으며, 늘 새로운 도전을 통해 현대 자기의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했다고 평가받는 일석(一石) 정선영 도예가를 팔탄면 독곡길에 위치한 일석도예연구소에서 만났다. 형형한 눈길, 두툼한 그의 손바닥에서 무심히 드러나는 상흔들, 무질서한 듯 조화를 이루며 흘러내린 곱슬머리에서 도예가의 풍모가 느껴진다.

 

一石 정선영 도예가는 고려 청자. 분청사기, 이조 백자를 바탕으로 새로운 방식을 통해 이 시대에 맞는 현대 자기를 만드는 데 집중하고 있다. 그가 새로운 방식으로 만들어 낸 요변접시의 아름답고 신비한 무늬는 유약의 혼합과 요변을 통해서 얻는 것으로, 가마에 불을 땔 때 변화를 주면서 유약을 흘러내려 붓으로는 도저히 그릴 수 없는 자연스러운 색깔과 모양을 만든다. 흙과 유약의 부조화를 통해 불로 그려낸 독특한 작품이다. 어떤 유약을 어느 위치에 어느 정도의 두께로 발랐을 때 나타날 형상들을 그려볼 수 있어야 가능하다. 불을 알고, 유약을 알고 지난한 경험으로 변화를 예측할 수 있어야 가능한 방법이다.

 

 

 

▲ 진사혼합요변접시(아름다운 여정)  © 화성신문

예술가로서 최고의 덕목은 창의성

 

一石은 예술가로서 최고의 덕목은 창의성, 독특함이라고 믿는다. 이를 위해 기본을 다지는 데 12년의 시간을 쏟은 후, 20년의 세월을 더해 자신만의 독특한 경지를 구축했다. 그는 늘 현대 시대에 맞는 새로움을 추구한다. 이를 위해 때로는 자연에서 배우기도 하고, 새로운 디자인을 눈여겨보기도 하고, 전시장도 많이 다니는 편이다. 새로움의 바탕에는 견고한 감각과 기술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감각은 머리로 되는 게 아니라 엄청난 반복 작업과 연습이 필요해 매일 작업을 한다.

 

그는 이러한 창의성을 위해 유약도 직접 만들어 쓴다. “지금은 좋은 유약들을 만들어 팔지만, 이런 유약들만 사용하면 희귀한 작품을 만들 수 없고, 나만이 할 수 있는 독창성이 없어지는 거죠”라고 이유를 설명한다. 사서 고생인 줄 알지만 작품의 창의성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감수한다.

 

그는 호기심이 많은 소년의 눈망울을 가지고 있다. 늘 호기심에 차 새로운 시도를 해보고, 이리저리 궁리하면서 기어코 방법을 찾아낸다. 그 깨달음을 얻는 데 어떤 것은 일 년이 걸린 것도 있고, 어떤 것은 십 년이 걸린 것도 있다. 이렇게 깨닫고 성장하면, 또 새로운 것을 찾아 나선다. 그래서 그의 도예는 항상 완성형이 아니라 진행형이다.

 

그의 작품은 색채와 문양이 신비롭고, 각각의 문양들이 살아 꿈틀거리며 날아오르는 듯하다. 화려하지 않으나 강한 생명력이 있고, 보면 볼수록 정감이 가는 구수함이 있어 보고 있는 사람에게 행복한 미소를 띠게 한다. 특히 그가 빚은 사발은 대토의 질감을 살려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곡선의 형태를 살려낸 소박함으로 보는 이의 마음을 평온하게 한다.

 

 

▲ 사발  © 화성신문

늘 모험적으로 새로움에 도전하기에 높은 파손율은 숙명적으로 감당할 수밖에 없다. 전 세계에 하나뿐인 작품을 만들기 위해 매일매일 도전하는 그에게는 아무리 좋은 작품이어도 이전의 작품을 다시 재현하는 일은 없다. 따라서 그의 작품은 어떤 것이든 단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명품은 고급스럽고, 장인의 손으로 잘 만든 브랜드이지만 세상에 하나가 아닌 이상 진정한 명품이 될 수는 없다. 이런 면에서 一石의 작품은 어느 것이나 명품이 될 자격을 갖췄다.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고유함을 각각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도자기는 형태를 조형하는 사람, 그림 그리는 사람, 조각하는 사람, 불 때는 사람, 유약 바르는 사람 등 많은 사람들이 협업을 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一石은 고생스럽지만 이 모든 과정을 혼자 진행한다. 다른 이의 손을 거치면 처음 의도했던 대로 작품이 나오기가 힘들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창의성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그의 작품들에는 이렇게 오랜 시간 많은 고생과 시행착오를 거쳐 터득한 경륜들이 하나하나 배어있다.

 

 

▲ 코발트혼합요변접시(모험이 꽃피우는 우주적 진리)  © 화성신문


미술 비평가 필립 지깰의 마음을 훔치다.

 

이러한 그의 도자기에 흠뻑 빠진 저명한 프랑스 미술 비평가 필립 지깰은 이렇게 평했다.

 

도기 제작에서는, 적어도 1280도의 굽는 온도와 그 온도의 단계, 식는 과정뿐만 아니라 오브제에 재를 떨어뜨려 처음부터 결함이 있었던 것을 이용하여 원하는 색상과 외관을 얻는다. 정선영의 작품들은 안료로 얻어진 푸른 가지색, 유백색, 붉은색, 어두운 밤색으로 도처에 기품있는 우아함을 지니고 있다. 선은 강하고 단호하다. 문양과 경험이 풍부한 사람의 손재주를 느낄 수 있다. 일부 작품의 심연에는 경륜을 가진 도공이 굽는 과정에서 온도를 조절해 가면 초월적으로 얻어낸 화려하고 섬세한 양각과, 또는 레이스 망, 얽힌 그물, 다마스 산직물, 귀퓌르(모티브를 만들 듬성듬성하게 이어 맞춘 레이스), 금은 장식 자수와 유약으로 덮여 있다. 필립 지깰(문학가, 시인, 문학비평가, 미술 비평가) - 이해원 번역가

 

필립 지깰이 밝혔듯 一石의 독특한 도기 제작 방법이나 표면에 남겨지는 다양한 문양들이 오묘한 색감과 만나면서 신비한 우주적 질서를 빚어낸다. 이런 독특한 요변접시를 만들게 된 계기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도자기는 유약과 흙의 발란스가 깨지면 균열이 생겨 버리게 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균열과 유약을 이용해 새로운 형태의 자기를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그래서 수많은 실험을 반복하면서 데이터를 얻게 되었어요. 인간의 붓으로서는 흉내낼 수 없는, 불이 그리는 독창적이고 자연스러운 문양들이 생겼어요. 그러면서 도자기를 통해 유럽으로 나가고 싶은 욕망이 생겼습니다. 유럽인들이 창의적인 것을 더 인정해 주기도 하고, 접시 종류를 좋아하기도 하니까요. 운반도 접시 형태가 좋고요”라며, “어느 날 저녁, 이 요변접시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는데 용 수천 마리가 나와서 다 태우고 춤을 추는 거예요. 저도 함께 어울려 정신없이 춤추는 상상을 한 적이 있습니다. 볼 때마다 느낌이 달라요”라고 설명했다.

 

이렇게 프랑스에서 인정 받고 있는 一石은  2014년 2월 7일부터 22일까지 프랑스 낭뜨에 있는 갤러리 TrES에서 ‘아름다운 동행’이란 초대전을 가졌으며, 아래와 같이 여러 차례 초청을 받아 해외 전시회를 가졌다.

 

 

2014년 Salon d’Automne전(프랑스 파리)

 

2015년 한일교류 50주년 기념 초대전(일본 오오사카 문화원)

 

2016년 초대 개인전 아름다운 동행4 Galerie Keny(프랑스 파리)

 

2017년 Socite des Artistes independants(앙데팡당전) 그랑팔레국립갤러리(프랑스 파리)

 

최근에는 프랑스 파리에서 전시를 위해 작품 100여점을 보내 놓았고, 스웨덴과는 전시회를 협의 중이다.

 

 

 

어린 시절, 가마가 가장 좋은 놀이터

 

一石은 바위가 많았던 인천의 석바위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당시 그가 살던 동네 근처에는 벽돌 공장, 도자기 가마, 기와 공장 등이 많았다. 친구 아버지 중에도 재래식 가마로 도자기를 굽는 분들이 계셨다. 어릴 때 썰매를 타다가 물에 젖으면 가마에서 말리기도 하고, 그곳에서 부대놀이도 하는 등 친구들끼리 즐겨 찾는 놀이터였다. 그는 어릴 때부터 손재주가 많아 그곳에서 흙으로 만드는 것을 좋아했다. 학교 다닐 때는 공부보다는 도예에 관심을 가져 친구 아버지가 하는 가마에서 일하면서 어깨너머로 배우기 시작했다.

 

一石은 어린 시절부터 본격적으로 도자기를 배우기 위해 홀로 전국을 떠돌았다. 전국에 도자기로 유명한 곳마다 섭렵했다. 때로는 며칠씩, 때로는 몇 개월씩 지내며 도자기를 배워갔다. 전국 20여 곳을 넘게 다녔다. 이후 인천에 방 두 칸짜리 세를 얻어 살았는데, 사람 좋아하는 一石은 어려운 살림 중에도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기꺼이 밥과 술을 주고 며칠씩 잠을 재워주었다. 이렇게 신세 진 도예가들이 기술적인 부분, 형태적인 부분, 유약 등 자신만의 비법을 슬쩍 지나가는 말로 흘리곤 했다. 이것 또한 一石에게는 큰 공부가 됐다.

 

이때 서양화를 전공하는 분들과도 교류가 많았는데, 이들로부터 귀동냥했던 것들도 一石의 도전적이고 창의적인 도예 방식에 도움이 됐다. 특히 칼라 채색에는 이들과의 교류에 힘입은 바 크다.

 

그는 군대를 다녀오자마자 스물 다섯의 젊은 나이에 개업을 했다. 어릴 때부터 물레질을 해왔기 때문에 물레질은 자신 있었고, 이때 이미 유약도 일부 개발해 둔 터였다. 다만 가마 불 때는 기술이 문제였다. 가마 불 때는 선배들에게 기술을 배우려고 심부름을 해가며 함께 있어도 중요한 타이밍에 술 심부름을 시키는 등 절대 가르쳐 주지 않았다. 개업을 해야 가마를 마음대로 쓸 수 있겠다 마음 먹고 개업을 했다. 대략 열 가마를 망치고 나니 좀 알겠더라고 한다. 이후 오랜 세월 직접 가마에 불을 때며 세계에서 유일하게 요변접시를 만드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一石은 자신의 도자기를 감상하는 사람들이 행복하기를 소망한다. 우리나라를 이끌어 나갈 리더들이 지식에만 몰입하지 않고, 예체능에 대한 소양과 안목을 길러 세상이 좀 더 문화적으로 풍요롭게 되기를 희망한다. 

 

그는 세상의 연륜이 쌓이면서 욕심을 하나씩 걷어내고 있다. 그의 이런 마음이 그가 빚는 도자기에도 투영되어 그의 도자기를 보면 마음이 평안해지는 것 같다.

 

세계에서 유일한 一石의 작품들이 널리 알려져 많은 사람들에게 행복을 선사하길 기대해 본다.

 

 

▲ 일석 도예 연구소 전경.  © 화성신문

 

▲ 도자기 전시실 내부 모습.  © 화성신문

 

신호연 기자 news@ihs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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