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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신문의 전문가 칼럼 화성춘추 (華城春秋)188]
복수와 용서: ‘더 글로리’가 남긴 질문들
 
화성신문 기사입력 :  2023/04/04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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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민 성균관대 외래교수     ©화성신문

“용서는 없어. 그래서 영광도 없겠지만.”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가 화제다. ‘왕따’를 당했던 나약한 학생이 자기의 남은 생을 바쳐, 가해자들에게 일말의 자비와 용서없이 복수를 한다는 서사에 많은 사람들이 열광했다. 그 열광에는 우선 ‘절대악’에 대한 응징이 주는 카타르시스가 반영되어 있을 것이다. 또한 가해자들의 폭력 대부분이 계급 격차를 기반으로 행사되거나 방조된 것이기도 했기 때문에, 그러한 사회적 신분의 예속을 초월했다는 사실이 주는 통쾌함에서 비롯된 면도 있을 것이다. ‘더 글로리’에 대한 지지는 ‘흙수저’와 ‘금수저’로 상징되는 신(新)신분주의 사회에 대한 ‘상상의 복수’가 일정하게 반영된 결과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게 전부일까? ‘더 글로리’의 성공에는 또 다른 해석이 필요하다. 세상에 복수극은 너무 많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더 글로리’가 흥미로웠던 것은 주인공 동은의 복수가 상당히 합법적인 바운더리 안에서 설계되어 있다는 사실에 있었다. 흔히 알려진 복수극은 국가의 법과 공권력이 폭력을 행사하는 주체의 계급적 권위에 짓눌려 아무런 효력도 발휘하지 못할 때, 피해자가 직접 또 다른 대항 폭력의 주체로 거듭나는 서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피해자의 사적 복수는 심정적으로는 납득 가능하지만, 실정법에 따르면 용인될 수 없는 딜레마적 상황에 봉착되기 마련인 것이다. 대체로의 복수극은 폭력과 법, 사회의 도덕률과 통념적인 인간의 감정 사이에서 발생하는 딜레마를 극의 장치로 소비하는 서사양식이라 할 수 있다. 

 

반면 ‘더 글로리’의 문동은은 아주 사적인 동기에 의한 복수를 기획하면서도, 감정을 철저히 관리하며, 자기를 끝내 법의 경계 안에 머물게 한다는 독특성이 있다. 푸코는 ‘감시와 처벌’에서 형벌의 목적이 교육으로 재정의된 것이 근대법 사상의 토양이 됐다고 말한 바 있다. 다시 말해 근대법 사상에서는 사형이 부정될 수 있는 만큼, 복수가 긍정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근대의 법이 법으로 있는 한 사적 복수는 인정되기 어렵다. 그런데 문동은은 사적 복수의 수단으로 법을 활용했다. 그녀가 원했던 것은 가해자 연진의 생물학적 죽음이 아니라, 사회적·상징적 죽음이었고, 그런 만큼 법의 판단이 필요했던 것이다. 동은의 복수 대부분이 법적 효력이 있는 증거와 진술의 확보를 목표로 설계되었던 이유가 여기 있다. ‘더 글로리’는 합법적으로 자행된 사적 복수를 그렸기 때문에, 심정적으로나 실정적으로 대중이 받아들일 만한 폭력을 그려냈다고 평가할 수도 있겠다.

 

복수는 대개 분노를 원동력으로 한다. 분노는 광기의 성질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성적으로 복수를 자행하기란 쉽지 않다. 문동은의 초월적인 면모는 그녀가 분노하면서도 자기의 감정을 끝까지 지연했다는 데 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아마 동은에게는 한 치의 양보도 없는, 그리하여 일말의 자비가 없는, 가해자들을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는 그 마음으로 자기의 감정을 컨트롤 했을 것이다. 용서할 수 없다는 각오는 피해자들에겐 자기 삶을 지탱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자 권리이기도 하다. 피해자에게 용서를 강제하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라도 폭력이 될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에게 국가를 위해 용서와 화해를 강요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일본의 철학자 우카이 사토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정말 위대한 지도자나 고결한 인격의 소유자라고 할지라도 국가원수나 정신적 권위라는 입장에서 피해자나 그 연고자들에게 가해자를 용서할 것을 명령할 수는 없다. 용서하라는 위로부터의 명령에 따라 화해를 실현하고 새로운 국가의 기초를 구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용서는 어떠한 목적의 수단도 될 수 없다.” 

 

우리가 문동은의 복수를 지지했다면, 그것은 그녀의 용서할 수 없는 마음에 대한 공감으로부터 가능했을 것이다. 식민지의 경험을 간직한 한국 사회에 필요한 것은 용서할 수 없는 그 마음에 대한 존중이라 할 수 있다. 용서와 화해도 또 다른 폭력일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할 요즘이다.

 

withnove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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