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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EO Interview-이경호 (주)스웨코 대표]
세계 최고 기술로 전기자동차 화재로부터 안전 확보
광석 구입부터 분쇄, 제지, 제품 생산까지 일관 공정 생산 체계 갖춰
 
신호연 기자 기사입력 :  2023/03/13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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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성신문

▲ 구미공장 전경.  © 화성신문

 

▲ 이탈리아 밀라노 근처 공장 전경.  © 화성신문



인간이 전기를 사용하는 한 전력 외부 유출이나 사고 예방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 전기절연물이다. 이 전기절연물로 세계 시장을 넘보는 전기절연업계의 히든강소기업 ㈜스웨코 이경호  대표를 찾았다. 겸손하면서도 문화적 감성이 묻어나는 인자한 모습으로 반겨준다. ‘다른 사람은 나보다 똑똑하다’는 생각을 늘 마음에 새기며 항상 겸손하게 타인의 의견을 경청하는 것을 소중하게 여긴다고 한다. 이런 습관이 몸에 밴 듯 대화에 앞서가지 않으려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일관 공정 생산 체계로 독자적 경쟁력 갖춰

 

이 대표의 조부 이중곤 翁은 1919년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문 낭독으로 시작된 만세운동에 호응해 1919년 4월 1일 충청북도 음성군 소이면 한내장터에서 김을경, 권재학 선생 등과 만세운동을 주도해 일제에 쫓겨 다녔다. 이런 독립운동가 조부 때문에 가정형편이 어려워진 이 대표의 부친 이희만 씨는 경성상공 전기과를 졸업하고 철도청에 취직했다. 이때 기차로 부산을 오가면서 전기절연재에 눈을 떠 1974년 성원전기공업주식회사를 창립했다.

 

㈜스웨코는 내년이면 50주년을 맞는다. 꾸준한 투자와 기술 개발로 내화 전선, 중전기기, 자동차 전장, 가전제품 등 산업 전반에 필요한 전기절연물 제조회사로 성장해, 국내 전기절연 업계에 값싼 중국 제품이 밀려 들어오는 와중에도 점유율 80~90%를 유지하고 있는 강소기업이다. 세계 시장에서도 스위스의 본롤(Vonroll), 오스트리아의 이소볼타(ISOVOLTA에 이어 세계 3위의 회사로 손꼽힌다. 봉담에 본사가 있고, 구미에 공장과 연구소가 있으며, 이탈리아 밀라노 근처에도 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올해 120여명의 직원으로 360억원의 매출을 예상하고 있다. 직원들의 근무 분위기도 좋아 장기 근속자들도 많고, 정년 퇴직을 하는 사람도 많다. 또, 중소기업으로서는 드물게 퇴직한 사람들끼리 정기적으로 OB 모임을 갖고 있기도 하다.

 

㈜스웨코의 강점은 대부분의 경쟁사들이 중간재를 구입해 제품을 생산하는데 반해 광석 구입부터 시작해 분쇄, 제지, 제품 생산까지 일관 공정 생산 체계를 갖췄다는 것이다. 제지 공정에 많은 노하우가 있어 신제품 개발에 유리한 입장이다. 이런 설비 한 대에 100억 정도의 초기 투자가 필요해 시장 규모가 제한적인 전기절연업계에서는 쉽게 뛰어들기가 어렵고, 유럽의 선진 업체들은 1950년대의 설비로 노후화 돼 성능 구현에 한계가 있는 상태로 독자적인 경쟁력을 갖추고 있는 셈이다.

 

㈜스웨코의 주력은 중전기 분야였는데, 최근 이 분야의 경기가 많이 침체돼 몇 년 전부터는 반도체와 전기자동차 분야로 눈을 돌렸다. 전기자동차 분야에서는 밧데리 셀 사이에 1mm 두께의 특수 복합절연재 판을 개발하여 한 셀에서 화재가 발생해 1000도까지 올라갔을 때, 운전자가 대피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 줄 수 있도록 Sim 절연재 반대쪽에는 150도 이내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제품이다. 전기자동차의 화재 위험으로부터 운전자를 안전하게 지켜줄 수 있는 획기적인 제품으로 최근 현대 자동차의 승인을 획득해 첫 주문을 받았고, GM, 벤츠 등 글로벌 자동차 기업들과도 협의가 진행되고 있어 이 부문의 매출이 획기적으로 늘어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 SIM 절연재 테스트 장면.  © 화성신문

 

▲ 전선흑마이카.  © 화성신문

 

▲ 프리프레그 반경화절연물.  © 화성신문

 

 

 

2,500여장의 유성기 음반 소장, 관련 책도 펴내

 

이경호 대표는 개인으로는 국내 최대 규모인 2,500여장의 우리나라 대중가요 유성기 음반(SP·Standard Play)을 소장하고 있다. 1980년대 후반부터 30여년간 1910년부터 1960년까지의 고음반을 수집했다. 이 대표는 음반을 수집하면 먼저 초음파 세척기로 묵은 때를 벗겨낸 후, 판지로 자켓을 만들어 넣고 관리번호를 붙여 엑셀로 자료를 정리한다. 사진도 찍고, MP3로 녹음도 해 놓는다. 박물관처럼 관리하고 있다. 음반을 들을 때도 음반 자체로 들으면 쇠바늘에 음반이 손상되어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MP3녹음으로 감상한다. 

 

2000년대 초반 소장한 음반이 200여장 정도 되었을 때, 홈페이지를 만들어 음원을 공개했다. 대부분의 수집가들이 자기의 소장품 공개를 꺼리는데, 이 대표는 반대로 소중히 모은 음반의 음원을 공개한 것이다. 이 대표는 “내가 갖고만 있으면 만족하긴 하지만 좀 허전하지요. 그걸 갖고 있으면 또 뭐 하겠어요. 자료가 있으면 남한테 알려야 된다고 생각해요”라며, “이렇게 공개하니까 대중가요를 연구하는 사람들로부터 ‘사진 좀 달라’, ‘녹음한 거 있으면 달라’, 이런 요청들이 와서 그냥 원하는 대로 다 줬어요. 그러자 이 사람들이 나를 선전해 줘서 유명세를 타게 됐지요. 또 소중한 음반을 기증해 주시는 분들도 있었구요”라며 음원 공개한 덕을 많이 보았다고 공유의 가치에 대해 말하는 이 대표의 얼굴에는 행복감이 느껴졌다.

 

이후 각 음반의 역사적 가치를 평하고 노래 가사를 일일이 확인하는 작업도 해 왔다. 포털사이트 지식백과에서 대중음악 평론가들과 진행한 ‘한국대중가요앨범’ 에도 필진으로 참여했고, 소장한 음반들을 토대로 대중가요 역사를 정리한 ‘대중가요 유성기 음반 가이드북’(안나푸르나 발행)을 펴내기도 했다. 책 구성과 집필은 물론 가사 채록, 음반 촬영까지 이 대표가 직접 진행하며 꼬박 2년에 걸쳐 만들었다. 대중가요를 연구하는 사람들로부터 “귀한 자료를 만들어 주어 고맙다”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책쓰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고 한다. 이 대표는 이 책을 쓴 다음 신문에도 소개되고, TV방송 출연도 여러 번 했다. 또 지자체, 박물관 등에서 개최하는 전시회 등에도 자료 대여 요청이 오는 등 유명세를 탔다.

 

음반 수집을 시작한 동기에 대해 묻자 “회사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갈 무렵, 인도 바이어에게 유성기를 부탁해서 장만했는데, 이것을 본 한 전문가가 ‘가짜’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제대로 공부하기로 마음먹고 이 길로 들어선 겁니다. 우연히 일제 강점기의 가수 채규엽의 음반이 희귀하기도 하고, 노래가 좋아서 1장을 처음 구입했지요. 그런데 아무도 그 이름을 몰랐습니다. 월북해서 그 존재를 잘 몰랐던 겁니다. 그 시대의 음반을 보존할 필요가 있겠다 싶어 수집을 시작한 거죠. 우리나라 가요의 흐름에 대해서 알게 되니까 빠진 것들을 자꾸 구하는 취미가 생겼지요”라며 설명하는 그의 눈빛은 아스라이 추억에 잠겨 갔다.

 

 

경쟁하던 100년 업력의 일본 기업 인수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후 미국으로 건너 간 이 대표는 메릴랜드 대학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인디애나 대학 경영대학원을 졸업하며 외교관의 꿈을 키웠으나, 부친의 부르심을 받아 1983년 부친의 회사에 입사했다.

 

이 대표는 80년대부터 국내 시장만으로는 한계를 느끼고 해외 수출에 눈을 돌렸다. 파키스탄에 처음 수출했는데, 이를 위해 해외에서 시장 정보와 기술 정보를 수집하며 세계 시장의 흐름을 쫓아왔던 것이 회사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입사 초창기, 카탈로그도 없이 대기업에 영업하러 가는 등 주먹구구식 업무 처리를 하나씩 시스템적으로 정리해 나가기 시작했다. 1991년 대표이사로 취임하기까지 부친의 경영 방식을 존중하면서 점진적으로 개선해 최대한 대립이 없이 경영 승계를 진행했다. 당시 매출액은 5억원 정도였다.

 

이 대표는 새로운 설비 투자에 중점을 두었다. 투자 여력이 생기는 대로 최신의 설비를 구축하며, KS 인증도 받고, 품질관리 경영도 도입하는 등 품질 차별화에 노력했다. 생산 공정을 자동화, 수치화하고 대기업들도 찾아와서 테스트를 요청할 정도로 각종 고가의 테스트 장비를 갖춰 나갔다.

 

가장 큰 위기이자 기회가 찾아왔다. 이 대표가 대표이사로 취임해 의욕적으로 마이카테이프 사업에 진출했을 때였다. 마이카테이프는 여느 테이프처럼 감는 형태의 절연물로 운모(雲母)를 분쇄한 다음 레진코팅 공정과 각종 화공기술을 더해 완성된다. 공교롭게도 ㈜스웨코가 신사업으로 마이카테이프 사업에 진출했을 때, 100년 업력의 일본 회사가 국내 회사와 합작으로 거의 동시에 시작했다. 기술력, 자금 등 모든 면에서 열세에 놓여 있던 상태로 절체절명의 위기가 찾아왔다. 당시 지나치게 대규모 투자를 했던 일본 회사는 코너에 몰리자 갖은 방해 공작을 폈지만 ㈜스웨코는 이 어려움을 잘 견뎌냈다. 대규모 투자를 진행했던 일본 업체는 고정비를 견디지 못하고 제풀에 망해버렸고, 이 대표는 이 일본 회사를 인수해 고급 기술을 단번에 확보해 발전의 원동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1994년의 일이었다. 이 대표는 이때 일본 경쟁사를 이기고 회사를 인수한 것을 가장 큰 보람으로 여기고 있다.

 

 

현장의 목소리를 외면하는 탁상행정으로 곤란 겪어

 

40여년간 기업을 경영하면서 어려운 점에 대해 물어 보았더니 크게 두 가지를 대답했다. “첫째, 우리나라 대기업들이 중소부품업체들을 보호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습니다. 중소부품업체들이 신제품을 개발하면, 더 싸게 개발하라고 바로 일본과 중국의 경쟁사에게 샘플을 보냅니다. 그런 행태로 우리나라 중소기업 부품업체가 어려워져 결국은 자기 발등을 찍는 건데 아직도 이렇게 하는 곳이 남아 있어요”라며, 중소기업의 기술을 보호하지 않고 근시안적인 이익만 취하려고 하는 일부 대기업에게 화살을 돌렸다.

 

“둘째, 현장을 살피지 않는 공공행정이 문제입니다. 이곳 공장 부지가 계획관리 지역이라서 들어왔는데, 인근에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우리도 모르게 공고만 해 놓고 녹지 지역으로 바꿔버렸어요. 이곳의 주민들에게 의견을 구하거나 적절한 대처 방안을 제시하는 것도 없었어요. 그래서 이 공장에서는 아무런 증설을 할 수가 없어요. 증설할 것은 전부 구미 공장으로 보내고 있는 실정입니다. 화성시가 기업 친화적이라고 하는데, 오히려 기업을 떠나보내는 것이지요”라며 탁상행정을 꼬집었다.

 

마지막으로 70세 노기업인의 입장에서 요즘 젊은이들에게 전할 조언을 부탁했다. “요즘 젊은이들은 너무 곱게 크고,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좋은 것만 보다 보니까 욕심이 많아졌어요. 그러나, 세상에 요술 램프처럼 한꺼번에 짠~~~ 하고 이뤄지는 일은 없어요. 욕심을 버리고 참고 인내하면서 차근차근 쌓아 나가야 되는 거죠. 일확천금이나 요행을 바라지 말아야 해요”라며 차근차근 쌓아가는 일상의 소중함을 역설한다.

 

큰 꿈을 꾸지만 터벅터벅 한 걸음씩 성실하게 전진해 나가는 ㈜스웨코가 50주년을 맞는 내년에는 이 대표와 커피 한 잔 하며 “실제 가수의 목소리 다음으로 자연스러운 음”이라고 하는 유성기 음반을 감상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신호연 기자 news@ihs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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