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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택수 시인 칼럼 2]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맛
 
화성신문 기사입력 :  2023/02/27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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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택수 노작홍사용문학관 관장     ©화성신문

아내는 라면을 경멸한다. 틈날 때마다 라면을 찾는 내 식성을 대놓고 나무라기까지 한다. 지구에서 인스턴트식품을 모두 몰아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녀는 특히 라면에 유독 극도의 불신감을 드러낸다. 그녀의 논리는 물론 ‘건강’ 때문이다.

 

“빠르고 편하게 요리할 수 있는 음식 치고 몸에 해롭지 않은 게 없어. 그중에 라면이 최악이야. 독배를 마시는 거나 마찬가지란 말이지. ”

 

사뭇 설교조인 아내의 일장 연설 앞에서 잔뜩 기가 죽은 나는 왠지 억울하다고 생각한다. 그녀의 훈계가 늘어날수록 궁지에 몰린 내 가련한 식성이 마치 사탄의 식성처럼 느껴져서 모욕감마저 일 때가 있다. 라면 때문에 옹졸하게 부부 싸움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이를 어쩐다,궁리 끝에 떠오른 게 아버지 이야기다.

 

나의 아버지는 자타가 공인하는 라면 광이었다. 자다가도 '라면' 하면 벌떡 일어나서 젓가락을 드는 위인이었다. 라면의 첫 탄생을 신화 속 영웅의 탄생처럼 기억하고 있는 아버지는 가난했던 시절 라면이 구황 식품으로서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를 자못 엄숙한 어조로 들려주곤 했다.

 

"타향살이에 쌀까지 떨어지면 먹을 게 뭐가 있었겠냐. 라면 한두 봉 사들고 와서 불쌍한 이마들 맞대고 허기진 속을 달래는 게 그나마 큰 위로가 됐지. 젊은 시절 서러움이 많아서 술이라도 한 잔 걸친 날은 라면 국물로 해장을 하고 힘든 고비 고비를 넘어가곤 하였구나."

 

시종 진지한 아버지의 라면 이야기는 비감한 구석이 있었다. 어머니가 막내를 낳고 먹을 게 없어서 라면을 끓여 먹었다는 대목에 이르면 그 처연함에 울컥 눈자위가 붉어 왔다. ‘눈물 젖은 라면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하고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 유년시절부터 귀에 못이 박혀라 들어온 아버지의 가훈을 따라 나는 자연스럽게 라면의 신도가 됐다. 라면교의 충실한 교도로서 아버지처럼 한밤에 일어나 라면을 끓였고, 아버지로부터 전수받은 다채로운 조리법을 통해 포교에 전념했다. 라면 맛의 미세한 차이를 구별할 줄 아는 능력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미각을 단련했고, 새로운 맛을 개발하기 위해 상상력을 동원하는 노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어쩌면 우리는 라면 맛을 즐기기 위해 등산을 가고, 낚시를 갔던 것이 아닐까. 라면 맛을 좌우하는 게 라면을 먹는 그때 그 장소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고 여행을 다녔던 것은 아닐까. 그것은 라면 봉지에 들어있지 않은 또 하나의 수프를 찾는 일과 같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이 수프는 함께 먹는 사람이기도 했고, 그 사람과 만들어내는 고유한 분위기이기도 했고, 그 사람을 위해 요리를 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라면  맛을 결정짓는다.

 

지금도 기억난다. 슬레이트 처마 밑 희미한 알등 아래 아버지가 끓여온 라면을 중심으로 모여 있던 가족의 모습이. 모이를 물고 온 어미 앞에서 벌어질 대로 벌어진 새부리처럼 탐욕스럽게 젓가락질을 해대는 새끼들에게 자신이 먹을 것을 나눠주며 흐뭇해하던 아버지의 모습이. 그리고 또 기억난다. 월급날 라면박스를 어깨에 메고 오는 아버지를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분이라고 생각했던, 가난하지만 따뜻했던 우리들의 한 시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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