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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택수 시인 칼럼1]
‘나는 왕이로소이다’ 발표 백 주년에 부쳐
 
화성신문 기사입력 :  2023/02/06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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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택수 노작홍사용문학관 관장

‘송판 책상 하나, 헌 무명이불 한 채, 헌 양복 몇 벌, 원고용지 신문지 등이 도깨비 쓸개 같이 어수선하게 흩어져 있는’ 곳. 노작 홍사용 선생의 백조시대에 남긴 여화에 나오는 백 년 전 종로 낙원동 ‘백조사’의 신산한 합숙 풍경이다. 

 

이 극심한 궁핍 가운데도 문단이나 연극계뿐만 아니라 대중음악에 이르기까지 종횡무진하며 문화 부식토 생산자로서 거름을 뿌리던 노작은 후배들을 위해 길을 트기도 하였다. 이광수의 어느 산문엔 ‘노작 홍사용이 소년 정지용을 데려와 인사를 시켰다. 그 미래가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는 대목이 보이고, ‘승무’의 배경으로서  용주사를 탐방하기도 했던 조지훈은 불교청년회 운동 당시 연극 자문을 구하기 위해 평소에 흠모하던 노작을 따라다닌 이야기를 곡진하게 남겨놓고 있다. 그의 ‘홍사용론’에서 노작은 “그 맑은 모습과 따듯한 심서, 깊은 신념, 뜨거운 의지는 나의 가슴에 이미 아름다운 영상을 이루었으니 목마르고 괴로움 많던 청년에게 그는 포근한 피의 파동과 맑은 꿈의 보람을 베푼 이었다.”( ‘조지훈 전집 3’, 일지사,  1973). 문학관은 어떻게 백 년 전 ‘피의 파동’을 ‘맑은 꿈의 보람’으로 ‘포근하게’ 법고창신할 것인가.

 

노작은 ‘이슬露’, ‘참새雀’ 을 써서 ‘이슬에 젖은 참새’라는 뜻이다. 독수리나 매 같은 맹금류가 아니라 작지만 친근하게 우리 곁을 지켜주며 노래하는 이슬 같은 투명함을 보여준 시인이다. 올해 발표 백 주년을 맞는 ‘나는 왕이로소이다’의  “이 세상 어느 곳에든지 설움 있는 땅은 모두 왕의 나라로소이다”의 그 설움과 가난과 그늘을 영롱한 이슬로 적시고자 했던 게 선생의 예술관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술가는 명명되지 못한 세계의 그늘을 간단없이 호명하는 방식으로 현실 권력이 닿을 수 없는 미의 왕국을 건국하게 된다. 백 년 전의 이 선언은 우리 시대의 예술이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를 생각할 때 여전한 명상의 대상이다.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말할 수 있도록 타자들과 겹쳐지는 순간, 혹은 유령으로 물화되고 배제된 삶들에 귀를 기울이는 순간들 속에 놓일 때 비로소 시인이며 작가란 자각이 온다. 타인을 어떻게 감각해야 하는가. 그 태도를 궁리하는 게 노작 선생을 받든 문학관의 숙제라고 하겠다. 

 

영화 ‘일포스티노’에 보면 우편배달부가 시인 네루다에게 말을 거는 장면이 있다. ‘선생님이 이 섬의 좋은 것은 다 가지고 떠난 줄 알았는데 저를 위해 남겨놓은 게 있었다’는 것이다. 시인이 남겨놓은 녹음기를 가지고 다니면서 그는 섬의 파도 소리와 아기의 심장 박동 소리, 그물질 하는 소리들을 녹음한다. 우리의 일상은 그처럼 시인의 언어에 포박될 수 없는 미지들로 가득차 있다. 예술 언어가 절망할 수밖에 없는 지점이 거기에 있고, 절망이 곧 절경의 가능성으로 나아가게 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문학관에 온 첫 해 ‘눈물의 왕’을 모시는 ‘누릉’의 능참봉을 선언했다. 세상을 왕으로 모시는 능참봉의 겸허를 익혀 지역민들의 삶을 드높이자는 뜻이었다. 다섯 번의 겨울을 나고 새봄을 기다리는 지금은 능참봉의 어깨에 영화 속 우편배달부의 배낭을 매어주고 싶다. 배낭 속엔 공들여 가려 뽑은 노래와 이야기뿐만 아니라 굽이굽이에서 만난 시민들의 노래와 이야기를 경청하는 녹음기가 들어있을 것이다. 발표 백 주년을 맞는 ‘나는 왕이로소이다’가 그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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