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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출신 조문기 義士 영면에 들다
“나의 독립운동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정은아 기자 기사입력 :  2008/02/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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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민관 폭파의거 주역)
마지막 소원 ‘친일인명사전’ 편찬
화성시가 챙기지 못한 독립운동가

조국 독립과 민족사 광정을 위해 평생을 바친 독립운동가 고 조문기 선생의 영결식이 지난 11일 서울 성공회 대성당 성프란시스홀에서 겨레장으로 엄수됐다. 겨레장은 고 문익환 목사 장례 이후 두 번째이다.
영결식에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함세웅 신부, 백기완 선생, 김국주 광복회장,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과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 고진화, 김희선 의원 등 시민사회단체 및 정계 인사 등이 대거 참석해 고인의 넋을 기렸다.
영결식을 마친 후에 부민관폭파의거 현장인 서울시의회 본관(중구 태평로)에서 다시 노제를 지낸 후 11시 서울을 출발해 수원 자택을 경유해 오후 3시 대전 국립 현충원 애국지사 제3묘역에서 안장식을 거행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장영심 여사, 딸 조정화, 사위 김석화, 외손녀 슬아, 슬샘, 양자 조강협이 있다.
정부는 고인의 업적을 기려 국민훈장모란장을 수여하기로 하고 지난 10일 빈소를 방문해 유족들에게 훈장을 전달했다
아쉬운 것이 있다면 화성 매송면 출신이지만 화성시가 제대로 챙기지 못한 것. 바로 고향의 무관심이다. 편집자주


매송면 야목리 출신 독립운동가
“조문기- 독립운동가, 부민관 폭파의거 주역”

   
-빈소에 헌화한 후 훈장을 근정하는 교육인적자원부 김정기 차관보
민족문제연구소 홈페이지에서 ‘연구소 소개-조직구성’을 클릭하면 이 같은 글귀가 첫눈에 들어온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조문기 선생의 상징성을 이 두 마디로 압축해 놓았다.

화성시 매송면 야목리에서 태어난 조문기 선생은 1945년 7월 24일 일제강점기 마지막 의열투쟁으로 널리 알려진 “부민관 폭파 의거”의 주역이다. 1944년 소년의 몸으로 일본강관주식회사에서 3000여 명의 조선인 노동자가 참여한 ‘조선인 멸시 규탄 파업’을 주도했다. 선생은 1945년 1월 조국으로 돌아와 항일비밀결사 단체인 ‘대한애국청년당(약칭 애청)’을 조직하고 친일파 거두인 박춘금과 총독부 주요 인사들을 처단할 계획을 세웠다. 박춘금의 ‘대의당’ 집회 광고를 보고 7월 24일 친일거두가 총집결한 아세아민족분격대회장인 부민관 폭파 의거를 결행했다.

   
부민관 폭파 의거 3주역 사진. 가운데 조문기 이사장 왼쪽 강윤국 선생 오른쪽 유만수 선생
이 의거는 가혹한 전시체제하에서 숨죽여 지내던 민중들에게 저항정신을 일깨웠으며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가 굳건히 살아 있음을 만천하에 과시하였다.

해방 후에도 선생은 ‘대한애국청년당’을 재결성하고, ‘인민청년군(대한청년군)’을 조직, 조국의 완전한 독립과 통일을 위한 투쟁을 중단하지 않으셨다. 1948년 6월 2일 이승만의 단독정부수립 기도에 저항하여 ‘인민청년군 사건’을 일으켰고, 그 결과 1년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분단과 상처투성이 조국에서 자신의 뜻을 제대로 펼치지 못한 선생은 10년 정도 연극배우로서 유랑생활을 하신 적도 있다. 1959년 다시 ‘현실’로 돌아온 선생은 난데없이 ‘대통령 암살, 정부전복 음모사건’의 주모자로 몰려 갖은 고초를 겪었다. 이때 당한 고문으로 허리를 다 펴지도 못하는 심각한 후유증을 평생 겪으셨다. 선생께서 “독립이 됐어도 그 독립은 친일파들의 독립이요, 해방이었다”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후에도 선생은 온 가족이 굶기 일쑤였던 생활고 속에서도 독립유공자로 이름 올리기를 끝내 거부했다. 부인까지 몸져눕게 되자 보다 못해 사위가 몰래 독립유공자로 등록해 선생은 1982년에야 ‘건국포장’을 받았다.

“친일청산, 오늘의 독립운동이다”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하고 1983년부터 ‘광복회 독립정신 홍보위원회 ’ 홍보위원이 되어 전국 순회강연을 다녔고, 1991년부터 8년간 광복회 경기도 지부장을 역임했다. 

 1991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출범하자 “친일청산은 바로 오늘의 독립운동이다”라는 신념으로 투신, 1999년 민족문제연구소 2대 이사장에 취임하여 오늘까지 친일청산을 위해 온힘을 쏟아오셨다. 정부가 개최하는 3·1절이나 8·15 광복절 행사에 참석하기보다 진정한 조국독립을 위해 거리의 투쟁을 선택하셨던 선생의 마지막 소원은 ‘친일인명사전’ 편찬이었다. 

  그러나 2006년 11월 혈액암 진단을 받아 자택이 있는 수원과 서울을 오가며 항암치료를 받던 중 몸이 더욱 쇠약해져 치료를 중단하고 요양병원에 장기 입원하셨다. 최근 다소 병세가 호전됐으나 갑자기 악화, 지난 2월 1일 중환자실로 옮기셨다가, 2월 5일 5시경 향년 82세로 별세했다. 생전 선생이 그토록 고대하던 친일인명사전 발간을 불과 6개월 남짓 앞둬 후진들의 애통함을 더하고 있다.

“나의 독립운동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독립운동사는 독립운동가 만의 역사가 아니다. 미래를, 후손을 위한 운동이다. 과거사 청산은 친일파 청산부터 첫 발을 내디뎌야 하고, 친일파 청산이 안 된 지금의 한국사회는 여전히 독립운동을 벌이고 있는 중이다.”(선생의 어록에서)

   
수원자택을 방문 부인 장영심 여사를 위로하고 있는 김용서 수원시장
그래서 조문기 선생의 회고록의 제목은 ‘슬픈 조국의 노러다. 완전한 독립이 되지 않은 조국, 1945년 일제는 물러갔지만 여전히 남북통일과 친일파청산을 이뤄내지 못한 그의 애통함이 묻어있다. 선생의 죽음이 제암리 만세사건으로 유명한 고향 화성에서 더욱 빛날 수 있는 그 날이 오길 기대해 본다. 

[고인의 약력]

1926 경기 화성 출생
1944 일본강관주식회사 파업 주도, 지명 수배
1945 대한애국청년당 결성
1945.7.24 부민관 폭파 의거
1948 단독정부 수립 반대운동(‘인민청년군 사건’) 옥고
1951 <황금좌><고려> 등에서 극단 활동
1959 ‘이승만 대통령 암살, 정부전복음모 조작사건’으로 투옥
1982 건국포장
1983-1988 광복회 독립정신 홍보위원
1990 건국훈장 애국장
1991-1999 광복회 경기도지부 지부장
1999 (현)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  
2001 (현) 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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