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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신문의 전문가 칼럼 화성춘추 (華城春秋) 119]
‘오징어 게임’과 요행(僥倖)사회
 
화성신문 기사입력 :  2021/10/11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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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민 노작홍사용문학관 사무국장     ©화성신문

 ‘딱지치기’와 ‘줄다리기’, ‘달고나’와 ‘깐부’ 그리고 ‘무궁화 꽃이 피어났습니다’에 열광하는 전 세계인들의 모습을 상상이나 해봤을까?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2021)’의 글로벌한 인기가 연일 화제다. ‘오징어 게임’은 총상금 456억 원이 걸린 의문의 서바이벌 게임에 참여한 여러 인간 군상들의 사연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구조조정 된 실직자와 이주노동자, 탈북자와 서울대 학벌을 가진 빚쟁이, 치매 증상의 노인과 조폭 등이 게임에 참여했다. 각자가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것 같으면서도, 이들 대다수는 주어진 현실에 대해 목숨을 건 요행으로 맞서야 했다는 점에서는 별다를 게 없는 처지였다. 다시 말해 그들은 사회의 단순한 ‘루저’가 아니라, 일한 만큼 벌어서는 현재의 고난을 극복할 수 없다는 흔한 좌절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오징어 게임’이 다분히 한국적인 오락거리를 기묘하게 펼쳐 놓았으면서도 전 세계인의 공감과 지지를 얻어 낼 수 있었던 요인 하나가 여기 있어 보인다. 노동이 원활한 삶과 계층 상승에 대한 보편적 욕구를 충족할 수 없을 때, 다른 한편으로 복지라는 사회적 안정망이 제 기능을 할 수 없을 때, 개인이 기댈 곳이라고는 도박과도 같은 요행 밖에 없을 것이다.

 

프랑스 작가 아나톨 프랑스는 “도박이란 운명과의 백병전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사회의 구조적 모순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자신의 처지를 일종의 운명으로 받아들인 개인이 도박에 의탁하게 되는 심리를 적절히 묘사하고 있다. 부동산이나 주식 투자, ‘영끌’에 목매다는 삶도 이와 크게 다르다고 할 순 없을 것이다. 물론 ‘영끌’조차 할 수 없는 사람들도 부지기수다. 이런 상황에서 자기의 운명을 비약적으로 바꿀 수 있을 만한 거액의 상금이 걸린 게임에의 유혹을 쉽게 뿌리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지금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은 모두 감당할 수 없는 빚을 지고 삶의 벼랑 끝에 계신 분들입니다. 게임에 참가를 원하지 않는 분은 지금 말씀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오징어 게임’의 참여자들은 ‘자발적으로’ 목숨을 건 베팅에 참여했다. 벼랑 끝에 몰린 삶이 더 이상 삶일 수 없다면, 그 사선(死線)에서 자기와 타인의 생명을 담보로 내건 것은 사실 대단한 도전이라 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 작품의 핵심은 여러 인간 군상들이 그토록 위험한 게임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던 경위나 동기에 대한 설득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참여한 종목의 특성 그 자체에 있다. 정확히는 게임 종목에 대한 세간의 이미지와 작품 속 게임의 기능과 효력 사이의 간극과 불화로부터 서사적 긴장이 추동 된다는 것이다.

 

‘오징어 게임’ 속 여러 종목들은 주로 유년시절에나 해봤을 법한 것들로 구성되어 있다. 주인공들은 세속적인 가치와는 완전히 무관한, 오히려 동심에 가까운 마음으로 즐겼을 게임 속으로, 오로지 돈을 따내기 위해 목숨을 걸고 투신한다. 이는 빚으로 벼랑 끝에 몰린 개인이, 빚을 지기 전의 자기로부터 얼마나 멀어졌는지에 대한 사실을 시공간적인 차이의 지평 위에서 보여줄 수 있는 최선의 서사적 장치라 할 수 있다. ‘오징어 게임’은 사회적 안전망에 대한 불신과 노동 가치의 하락에 대한 공통의 감각을 바탕으로 하지 않았다면, 글로벌한 성공을 거둘 수 없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오징어 게임’을 보고나서, 문득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2019)’이 떠올랐다. 주지하듯 ‘기생충’은 반지하에 거주하는 하층민들이 대저택에 사는 상류층 가족에 기생충처럼 빌붙어 있다가 벌어진 참극을 다뤄 세계인의 공감을 샀다. 빈부 격차와 계급 차별이 극에 달한 오늘날, 하층계급에겐 두 가지의 길만이 허락된 것 같다. 

 

상류층에 기생하며 그들의 피를 빨아 먹든지, 아니면 목숨을 건 요행(혹은 도박/게임)에 참여하든지. 이토록 비참한 선택지들만이 궁핍한 삶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상상 가능한 유일한 대안으로 여겨지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좌절의 두 가지 양태를 담은 시대의 걸작 모두가 바로 이곳 한국에서 탄생했다는 사실이 새삼 무겁게 다가온다. 

 

master@nojak.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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