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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신문의 전문가 칼럼 화성춘추 (華城春秋) 86]
각지불이(各知不移)
 
화성신문 기사입력 :  2021/01/25 [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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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찬석협성대학교 교수     ©화성신문

모든 생명들은 하늘이 정하여 준 제자리가 있다. 물고기의 자리는 물속이고, 나무의 뿌리는 땅속에 자리를 잡아야 한다. 물고기가 물로부터 옮겨지면(移) 죽임이고, 나무의 뿌리가 땅속으로부터 옮겨지면(移) 죽임이다. 생명들은 자신의 자리가 있으므로 옮겨지지 않고 자신의 자리에서 살아가야 한다.

 

동학(東學)은 생명들이 제자리에서 ‘옮겨지지 않음’을 의미하는 불이(不移)를 강조한다. 동경대전에 보면, 수운(水雲) 최제우는 하느님을 모신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시천주(侍天主)의 시(侍)자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侍者는 內有神靈하고 外有氣化하야 一世之人이 各知不移者也요.” 시(侍)는 하느님을 내 마음에 모시는 것을 의미하고, 내유신령(內有神靈)은 안에 신령함이 있음을 의미하고, 외유기화(外有氣化)는 밖으로 기화(氣化)가 있음을 의미하고, 일세지인이 각지불이자야(一世之人이 各知不移者也)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각각 서로 본성에서 옮겨질 수 없음을 깨우쳐 안다는 것이다.

 

하늘의 뜻을 깨닫고 하느님을 모신 시천주(侍天主)의 사람은 모든 사람들이 각각 자신의 자리에서 옮겨질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아니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들이 제자리에서 옮겨질 수 없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리라.

 

동경대전 논학문(論學文)에 보면, 수운 최제우가 하느님에게 동학과 서학은 어떻게 다르냐고 물으니 하느님은 이렇게 대답한다. “양학(洋學)은 우리 도와 같은 듯하나 다름이 있고 비는 것 같으나 실지가 없느니라. 그러나 운인 즉 하나요 도인 즉 같으나 이치인 즉 아니니라.” 동학과 기독교는 도(道)는 같지만 이치(理致)는 다르다는 것이다.

 

수운 최제우가 살아가던 시기에는 한반도에 서양의 제국주의와 서학(西學)인 기독교가 들어오던 시기이었다. 기독교는 홀로 들어오지 않고 제국주의와 결혼하여 함께 들어왔다. 제국주의는 낯선 땅으로 침략하여 수많은 생명들을 뿌리째 뽑아 버렸다. 모든 생명들은 ‘불이적 존재’(不移的 存在)임에도 불구하고 제국주의는 ‘불이적 존재’들을 ‘이적 존재’(移的存在) 만들어서 죽임의 구조와 죽임의 문화를 낳았다.  

 

스페인은 라틴아메리카의 수많은 생명들을 ‘이적 존재’로 전락시키면서 제국주의를 심고 기독교를 소개하였으며, 영국은 인도의 수많은 생명들을 ‘이적 존재’로 취급하면서 제국주의를 심고 기독교를 소개하였다. 기독교가 힘주어 강조하는 본래적인 가르침은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소중하고 평등하다는 사실이다.

 

성경(창세기)에 따르면,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으로 창조되었으므로 하나님의 형상은 모든 사람들이 동일하게 지니고 있다. 기독교의 본래적인 가르침은 라틴아메리카와 인도의 모든 생명들은 ‘불이적 존재’라고 선언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제국주의와 손을 잡고 ‘불이적 존재’들을 ‘이적 존재’로 탈바꿈시켜 버렸다.

 

코로나로 인하여 사람들의 이동이 봉쇄되거나 제한되고 있다. 코로나는 사람들을 ‘불이적 존재’로 만들어가고 있다. 세계화로 인하여 사람들은 여기저기로 이동하는 ‘이적 존재’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는데, 코로나19는 사람들을 단숨에 ‘불이적 존재’로 만들어 버렸다. 우리들의 시야가 물리적 움직임(이동)에만 갇혀서는 안 된다. 더 넓고 깊게 보면서 본성적 움직임(이동)을 냉정하게 성찰해 보아야 한다.

 

화성지역에 살아가고 있는 이주노동자들이 지니고 있는 인간으로서의 본성을 ‘불이’(不移)적 요소로 보지 않고 ‘이’(移)적 요소로 간주하면서 그들을 차별하고 멸시하지 않았는지? 한없이 약한 어린 아이들의 생명을 ‘이적생명’(移的生命)으로 보면서 폭언과 폭력으로 얼마나 억압하였는지? 화성지역의 땅에 뿌리를 내린 자연적 생명들을 ‘불이적 존재’로 보지 않고 ‘이적 존재’로 간주하면서 우리들의 편리와 행복을 위하여 자연을 얼마나 파괴하였는지? 

 

모든 생명은 고귀하다. 이주 노동자들의 생명도, 어린 아이의 생명도, 자연적 생명들도 모두 고귀하다. 더 나아가서 모든 생명은 고유한 자기의 자리를 지니고 있다. ‘移的 생명’으로 생명의 자리가 옮겨진 아픈 생명들이 ‘不移的 생명’으로 존중받으며 살아가는 아름다운 세상이 열리기를 소망하여 본다. 코로나19로 인하여 만남과 이동이 제한되고 마스크를 쓴 삶을 이어가면서 수운 최제우가 힘주어 가르쳤던 각지불이(各知不移)를 깊게 성찰해 보아야 한다. 후천개벽(後天開闢)의 밝은 세상을 위하여!

 

chanseok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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