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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19] 개인의 자유와 바람직한 삶 (밀의 젊은 날의 초상)
오인영 역사학자,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교수
 
화성신문 기사입력 :  2018/09/21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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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인영 역사학자,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교수     © 화성신문

존 스튜어트 밀은 19C를 대표하는 서양 사상가이다. 일반적으로 존 스튜어트 밀이 자유란 무엇인가에 대해 서재나 연구소 등에서 학문적으로 관념적 탐구를 통해 얻어진 결실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은 젊은 날의 체험으로 얻어진 책이다. 우리는 오늘 첫째, 존 스튜어트 밀의 한 생애를 통해서 자유론에서 무엇을 강조하려고 하는가? 둘째, 자유론이란 책 안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져 있는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영국, 독일, 프랑스, 미국 등 서양의 대학에서 꼭 읽어야할 권장도서에 공통적으로 두 권의 책이 권장되는데 호머의 일리아드와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이다. 이 책을 통해 서양인들의 정치를 보는 시각과 인간관계에서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를 엿 볼 수 있다.

 

존 스튜어트 밀이 계몽 사상가로 서양을 대표하는 사상가라면 그에게 영향을 준 그의 아버지 제임스 밀은 영국을 대표하는 10대 사상가로서 그는 아들을 통해 인간이 좋은 교육을 받으면 얼마나 합리적이고 똑똑한 인간이 되는지를 증명하려고 하였다. 밀은 네 살 때 그리스어를 배워 여덟 살 때 그리스어로 된 『에피크로스의 쾌락』을 읽을 정도로 완벽하였다. 9살 때부터 고대 문헌을 읽기 위해 라틴어를 배워 13살에 마스터하였으며 14살 때부터 경제학을 배웠다. 한 시대의 첨단 학문이 무엇인가를 보면 그 시대가 가는 방향을 볼 수 있다. 20C 빛나는 학문 중 문화 인류학이나 이과의 진화 생물학 특히 뇌 공학 등을 통해 소비자의 욕망의 정체를 뇌의 뉴런의 매커니즘을 통해 설명하고자 하였다.

 

1720년대는 정치가 중심이었으나 아담스미스를 통해 경제학이 인간세상에서 독립적이고 매우 중요한 영역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때 당시는 경제학이란 용어가 없었으며 경제학이라는 말은 1902년 처음으로 케임브리지대학 알프레도 마샬이 사용하 였다. 1820년에 제임스 밀은 과거 선조들의 살아왔던 인간의 길도 알아야 되지만 친구인 데이빗 리카르도사 쓴 책으로 최첨단의 경제학의 가르침을 통해 아들에게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와 오늘의 현실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고전에서 중요한 것은 솔선수범과 용기를 그리스 철학의 세계에서는 인간과 인간에서 중요한 것은 사랑과 신의와 우애의 우호관계를 배워야 한다고 가르친다. 현실 세계에서는 정신적인 이상과 가치와 물질적인 실리가 걸려있을 때는 정신적 이상과 가치를 지키기가 어렵다. 제임스 밀은 존 스튜어트 밀에게 역사적 관점과 현실을 볼 수 있는 리얼리즘의 관점을 동시에 알려주었다.

 

16세 때 친구와 대화가 안 되는 것을 통해 25년 정도 앞서있는 정신세계를 가지고 있음을 인지하게 되었으며 혹시라도 밀이 자만 할까봐 누구든지 나 같은 아버지를 만나면 너처럼 될 수 있으니 자만하지 말라고 교훈 하였다. 존 스튜어트 밀이 아버지가 나에게 가르쳐준 것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아버지가 항상 ‘나’에게 질문 하라.”고 했다. 자기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을 통해 성찰과 자성을 하고 철저히 검토하면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분별하는 능력은 자신에게 있다. 존 스튜어트 밀은 반론하는 사람을 생각하면서 글을 썼기 때문에 그의 책은 설득력이 높다. 제임스 밀은 존 스튜어트 밀에게 생각하는 힘이 아니라 생각하는 방법에 대해서 가르쳐주었다.

 

존 스튜어트 밀은 17, 18세 약관의 나이에 아버지 친구 제라미 벤덤 등과 친하게 지냈으며 제라미 벤덤의 사유의 세계,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대우해야 한다는 공리주의사상을 존 스튜어트 밀이 공유하게 되었다. 20세에 존 테일러의 아내 헨리어 테일러(Harriet Taylor 1807~1858)를 만나 사랑하다가 존테일러 사망 2년 후 만난 지 21년 만에 결혼하게 되었으나 그들의 결혼생활은 8년 만에 프랑스 아비뇽으로 여행을 갔다가 폐충혈에 걸린 해리엇의 사망으로 끝났다. 그들의 결혼에 대해 옐로우 저널에서 릴레이 보도를 통해 악평이 지속 되었고 밀과 해리엇의 관계에 대해서 “자비의 신은 그들이 결백하다고 말하고, 수치의 신은 그들이 부정하다고 말하네”라고 촌평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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