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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대책위의 정조 초장지 논란 전문
정조 초장지 위치·진위 검증 공개토론 제안
기록은 현릉원 ‘동쪽’, 지정은 ‘남쪽’
‘택지개발 원천 봉쇄 의도’ 주장
 
화성신문 기사입력 :  2013/12/18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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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릉     © 화성신문
 
최근 채인석 시장과 용주사 정호 스님 그리고 경기문화연대 인사들은 정조대왕 초장지에 대해 사적지정을 추진 중이다.

주된 목적은 화성태안3지구의 문화재보호구역을 확대시켜 택지개발사업을 원천 봉쇄시킬 의도다. 그러나 초장지라고 주장하는 장소는 역사기록과 일치하지 않는다.
또 2011년과 2012년 발굴때 출토된 유구·유물의 구조와 내용도 2008년 조선왕릉 사상 최초이자 유일하게 발굴된 내곡동 장경왕후 능과 비교해서 공통점을 발견할 수 없다. 초장지임을 입증할 역사적 과학적 자료는 전무한 셈이다.

그럼에도 10년째 객지를 떠돌고 있는 화성태안3지구 원주민들의 고통과 희생은 외면한 채, ‘아니면 말고’식 초장지 사적 지정을 계속 고집하고 있다.

각 분야의 전문가라면 사실에 근거해 제기한 의문에 대해서는 답변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이에 화성태안3지구 원주민 대책위원회는 초장지 사적지정을 추진하는 화성시·용주사·경기문화연대 측에 다음과 같은 역사기록과 증빙자료를 제시하며, 사적지정 신청에 앞서 위치의 진위를 검증하는 공개토론회를 제의하는 공문을 지난 16일에 발송했다.
 
▲ 지도     © 화성신문
 
 
◇ 위치

모든 역사기록은 현륭원 동(東)쪽 2번째 산줄기에서 장사를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초장지라고 주장하는 위치는 1번째 산줄기 남(南)쪽 끝에 위치한다.
그럼에도 역사·과학적인 근거 없이 ‘효심이 애틋한 정조대왕이 아버지 무덤 아래에서 시묘 살이 하는 모양새를 취하기 위해 융릉 남쪽에 장지를 정한 것이다’와 같은 구전을 근거로 초장지 위치를 독단해서 사적지정을 요구하고 있다.

이는 마치 서울(융릉: 현륭원)에서 출발, 강릉(역사문헌 상 위치)에 도착 바다를 봐야하는데, 삼천포(초장지라고 주장하는 위치)로 빠져 남해 바닷가를 배회하며 동해를 보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그만큼 ‘융릉 동쪽 2번째 산줄기에 모셨다’는 역사기록과 초장지라고 주장하는 위치(융릉 1번째 산줄기 남쪽 끝)는 동떨어져있다.
 
가) 정조대왕 비문(碑文) ‘정조실록’ 24년 부록

‘경신년(1800년) 6월 28일 승하하시고, 그 해 11월 6일에 화성의 현륭원(현 융릉) 동쪽 둘째 산등성이 해좌(북북서를 등지고 남남동을 향하는 방향)로 된 자리에다 장사지냈다.’
이 내용은 정조실록 24년 부록속편에 기재된 정조대왕 천릉 비문(遷陵碑文)과 효의왕후(정조대왕의 비) 천릉표석 뒷면에 새긴 글(遷陵表石陰記)과도 동일하다.
 
나)효의왕후(정조대왕의 비)의 천릉지문(遷陵誌文)

‘아! 우리 열고 정종대왕을 그 전에 화성 현륭원의 동쪽 산기슭에 장례를 치루고 건릉이라고 했다”
 
다) 정조의 장례의식을 기록한 ‘건릉산릉도감의궤’

‘건릉(초장지)은 현륭원 제2 청룡(두 번째 산줄기) 바깥쪽 옛 강무당 뒤에 모셨다”
 
라) 정조대왕 시책문(諡冊文)

‘다행히도 새로 정한 산릉(山陵, 초장지)이 원침(園寢)과는 바로 산등성이 하나 사이여서...’
그렇다면 첫 왕릉터는 현륭원(현 융릉)에서 산등성이 하나를 건너 조성됐는 결론이다. 반면 현재 초장지로 알려진 위치는 첫 번째 산등성이 하단에 위치하기 때문에 산등성이를 건널 수 없다.
 
마) ‘건릉지’ 권1 능원침내금양전도

초장지의 위치를 ‘구릉기’(舊陵基)로 표기했다.
지도(현 지형과 일치한다) 상 구릉기 위치는 모든 역사기록과 부합되게 현륭원(융릉) 동쪽 2번째 산줄기 바깥쪽에 표기돼 있다. 결과적으로 ‘능원침내금양전도’에 표기된 구릉기 위치는 현재 초장지라고 주장하는 장소가 아니다.
 
▲ 능원침금양전도     © 화성신문
 
 
▲ 초장지 지도     © 화성신문
 
 
 
◇ 지형

능이 높고 가파르다고 했는데, 평지에 가까운 지형이다.
 
가) ‘순조실록’ 순조 4년(1804) 6월 29일

봉심(奉審)하러 갔던 대신(大臣) 김관주(金觀柱) 등을 소견(召見)하였다. 김관주가 아뢰기를, “옛날 선조(先朝) 계묘년에 원릉(元陵)의 사초가 5월에 탈이 있어 8월 행행(幸行) 때 친히 임하시어 수개(修改)하신 적이 있었는데, 능위의 형체가 높고 가팔랐기 때문에 선조께서 ‘지금 비록 수개하기는 했지만 뒷날 염려가 없지 않다’고 하교하시고 능위의 높고 가파른 곳을 다시 평평하고 둥글게 하였습니다. 이제 이 건릉(健陵) 능위의 형체 또한 이처럼 높고 가파르니, 일후에 수개할 때 대략 원릉의 전례에 의해 조금 평평하고 둥글게 만든다면 아마도 뒷날의 염려가 없을 듯합니다.”

당시 정조대왕 초장지터와 비교되었던 원릉(元陵)은 정조대왕이 1783년 8월6일 지시해 릉을 평평하고 둥글게 조성하는 공사를 했다. 하지만 사진에서 보듯 현재까지도 높고 가파르다.

조선 왕릉은 이장 후에도 초장지터를 일반인들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봉분을 남겨뒀다. 그렇다면 정조대왕 초장지터도 원릉 정도의 급경사를 유지해야만 설득력을 지닐 것이다. 하지만 초장지라고 주장하는 위치는 평지에 가까운 지형으로 왕릉의 능침으로 인정할 지형이 아니다.
 
나) ‘일성록’ 정조18년(1794) 1월 13일

정조대왕이 ‘현륭원’ 참배를 마친 후, 화소(火巢)를 점검하기 위해, 현륭원에서 출발, 사도세자 무덤의 좌청룡을 경유, ‘강무당’ 뒤 기슭(훗날 초장지 터가 된다)으로 올라 주변을 살펴보고, 산등성을 따라 성황산(용주사 뒷산)에 올랐다고 기술됐다. 그렇다면 초장지터는 적어도 현륭원의 좌청룡(東第一岡)을 지난 후, 용주사 뒷산으로 진행하는 중간에 소재하는 ‘높은 지대’ 혹은 ‘높은 지대로 올라가는 지점’에 소재한다고 가정하는 것이 타당하다. 반면 초장지라고 주장하는 장소는 지대가 낮다.
 
◇ 회격(灰隔) 부재와 부장물 발굴 위치

2011년 2012년 발굴한 초장지 바닥은 깊이가 대략 1.5m 이상인 것으로 사료된다. 하지만 동 깊이에서 당연히 존재해야만 하는 회격(灰隔)의 온전한 형태가 존재하지 않았다.
 
2008년 조선왕릉 최초로 발굴된 내곡동 장경왕후 능에서는 발견됐다
반면 회격 덩어리만 대량으로 출토됐는데 이는 회격을 해체한 파편으로 인정하기 곤란한 형태를 띠고 있다. 물론 파괴했다는 기록도 없다.

실제 순조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정조대왕 초장지의 회격은 조심스럽게 쪼아서 해체하였다고 기록됐다.
 
광중(壙中)의 재궁을 드러낼 때에 아랫 모퉁이에 있는 판자 전면의 회격(灰隔)을 모두 쪼아내자 그 아랫 모퉁이에 있던 판자가 비로소 노출되었습니다.

-순조실록 1821년(순조21) 9월 6일-
 
그렇다면 초장지터 역시 장경왕후 능처럼 회격의 전면만 해체하고 나머지는 보존되야 정상이다. 설사 불손하게 회격 전부를 파괴했다 하더라도 덩어리 형태로 해체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초장지라고 주장하는 위치는, 사도세자, 정조대왕, 혜경궁홍씨, 효의왕후 등의 4차례 국장 시 설치한 삼물소, 번와소 등과 같은 임시 작업장이 밀집되어 있었던 장소일 가능성이 높다.
 
▲ 장경왕후 능 회격     © 화성신문
 
 
▲ 회격 덩어리     © 화성신문
 
 
 
◇ 논리적 배경 상실

초장지가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된 건, 2007년 ‘화성태안3택지개발지구’의 문화유적 시·발굴조사 과정에서 3지점이 초장지의 재실 터로 확인되면서부터였다.

그러자 용주사·경기문화연대·한신대학교 박물관 측은 융·건릉 경계 밖 남쪽 50m 지점에 소재한 1지점을 초장지의 정자각과 참도(參道)로 유추·속단해서 그를 근거로 초장지 위치까지 예단해서 세상에 공개한 것이다.

하지만 2010년 경기문화재단에서 발간한 ‘화성 화산동 유적’ 화성태안(3)지구 택지개발사업부지내 문화유적 시·발굴조사 보고서에는 1지점은 초장지 정자각의 유구가 아니며, 참도 역시 구 수원부 읍치의 도로일 가능성에 무게를 두었다.

그렇다면 3지점(재실)에서부터 출발, 1지점(정자각)을 경유, 동선을 연장해서, 현 위치를 초장지라고 주장했던 논리는 모두 설득력을 상실한다.
 
그렇기 때문에 정조대왕 초장지 사적지정은, 역사기록과 괴리 문제를 논리적으로 푼 후 진행되어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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