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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시 문화유산 산책 - 2
대원군의 한, 조선의 한이 서린 마산포
 
김충배 경기도 문화재 전문위원 기사입력 :  2012/03/02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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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충배 경기도 문화재 전문위원

남양에서 사강을 거쳐 북서쪽으로 이어진 322번 지방도를 타고 반도 끝머리에 이르면 고포리라고 하는 고즈넉한 마을에 이른다. 지금은 간척으로 사방이 막힌 듯 답답하여 옛 자취를 가늠하기 쉽지 않지만 한때는 서해의 물산을 근기지방과 중앙에 실어 나르던 대항이 있었다. 그 항의 이름은 마산포다. 그리고 이 마산포는 구한말 드세디 드센 외압에 맞서 국운을 일으키려 했던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청나라에 압송돼 갔던 역사적 한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조선조에는 총 네 명의 대원군이 있었다. 대원군은 왕이 후사가 없이 죽게 될 경우 종친 중에서 왕의 위를 잇게 되는데 이 때 왕위를 잇게 된 종친의 부친을 일컬어 부르는 호칭이다. 선조의 아버지 덕흥대원군, 인조의 아버지 정원대원군, 철종의 아버지 전계대원군 그리고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바로 그들이다.

흥선대원군은 철종이 후사 없이 죽게 되자 둘째 아들이 왕위에 오르게 되면서 정계의 전면에 나서 국가를 운영하게 되었다. 흥선대원군은 자신의 손자 즉 고종과 명성황후 사이에 출생한 아들이 항문이 막혀 죽어가는 와중에도 외국 의사들의 힘을 빌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려 결국 원자가 죽는 사태까지 발생할 정도로 외세에 대한 강한 반발심을 가지고 있었다. 더구나 서양 외세와 왜는 한통속이라는 왜양일체(倭洋一體)라는 생각을 뿌리 깊게 간직하고 있었으니 내치는 고사간에 온통 조선을 집어 삼키려는 야욕이 꿈틀거리는 외세들의 공공의 적이 되었다.

   
▲ 흥선대원군 초상

이렇듯 강력한 쇄국 정책을 고수하던 대원군은 고종이 섭정을 벗어나 친정을 요구하게 되면서 정계를 잠시 떠나게 되었다. 이에는 며느리 명성황후의 영향도 컸다(사랑하는 아들을 고집쟁이 시부 때문에 잃게 된 그녀의 한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러다가 임오군란을 계기로 다시 정계에 돌아오는데, 이 때 군란의 원인을 제공했던 명성황후는 죽지 않고 돌아와 청에 원군을 요청하게 되었다.

호시탐탐 조선에 발을 붙일 구실만 삼던 청은 대군을 이끌고 바로 마산포에 상륙하고 한양으로 진격해 흥선대원군 이하응을 체포하여 천진으로 압송해 간다. 한양에서 마산포 300리 길을 하룻 밤새 끌고 왔다고도 한다. 이후 천진에서 4년가 유폐되었다가 다시 환국해 운현궁에서 머무르며 재기를 노렸지만 끝내 저물어가는 조선의 국운과 같이 그 자신의 운명을 되돌리지는 못했다.

비 내리는 마산포 300리길. 그는 무슨 생각을 하며 그 길을 걸었을까. 동이 트면 목적지도 모르는 채 또다시 끌려갈 텐데 마산포의 허름한 민가에서 그는 무슨 생각을 하며 그 밤을 지새운 걸까. 굉음 속에서 시커먼 연기를 내뿜으며 움직이는 증기선 선실에서 또 무슨 생각을 했을까. 지금은 도무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다만 아직도 선조로부터 마산포에 얽힌 구한말의 아픈 사연을 듣고 기억하는 주민을 만나 볼 수 있어 국가의 최고 정치 수반이 하룻밤새 외세에 개끌려가듯 끌려가는 망국의 한이 그다지 멀지 않은 과거에 벌어진 역사라는 점을 일깨워 준다. 마산포는 조용히 그렇게 웅변하고 있다. 또다시 그런 역사를 되풀이 할 것이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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