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광고
광고
인터뷰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THE CEO 인터뷰-김송환 ㈜화신페이퍼텍 대표]
‘따뜻한 생각 행복한 우리’
37년 제지포장업 외길 인생
 
신호연 기자 기사입력 :  2024/03/04 [18:07]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 화성신문

 

 

팔탄면에 위치한 ㈜화신페이퍼텍은 골판지 박스를 메인으로 컬러 박스, 농산물 박스 등 각종 박스를 제조, 공급하는 박스 전문기업이다. ‘따뜻한 생각 행복한 우리’라는 슬로건 아래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착한 기업으로 선정되는 등 지역주민과 소통하고 임직원 모두 함께 즐거운 관계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하는 기업이다. 당진에는 자매회사 ㈜화신포장이 있다.

 

2005년 11월 9일 창업 후 앞선 기술 개발과 투자로 꾸준한 성장을 기록하고 있다. 제지포장업 37년의 외길을 걸어온 김송환 대표의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후렉소 3도 인쇄기계, 톰슨기계, 자동글로야스테칭 기계 등 박스 생산에 필요한 다양한 설비들을 보유, 매일매일 체계적인 수발주 계획 수립으로 다품종 소량 생산도 가능하다. 공장에서 포장박스를 생산, 전용 차량 배송으로 납기에 신속하게 대응해 높은 고객만족도를 자랑한다.

 

 

  © 화성신문



 

영업으로 날개를 달다

 

김 대표는 1987년 대양제지에 입사했다. 처음 QC부서에서 근무하다가 영업부서로 자리를 옮겼다. 종이의 품질에 대해 완전히 파악하고 있는 것이 영업 초창기에는 마이너스가 됐다. 종이에 대해 너무 잘 알기에 소위 영업 멘트를 함부로 날리지 못하는 것이다.

 

 차츰 영업에 적응하면서 거래처와 원활한 소통을 유지하며 빼어난 실적을 보여 빠르게 진급했다. 특히 주요 거래선의 야유회, 창립 기념일 등 회사 행사에 적극 참여와 통근 찬조를 하는 등 고객들의 입장을 즐겁게 해 주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본인 부서에 명문대 출신 직원을 배치해 본인이 부족했던 프레젠테이션 자료 작성 등을 맡겼다. 거래처 사람들하고 인간관계가 좋아 소통이 잘 되는 김 대표와 자료 분석 및 작성에 빼어난 실력을 가진 직원들과의 시너지 효과로 항상 실적 상위권을 놓치지 않았다.

 

 이렇게 빼어난 영업실적으로 대양그룹에서 회장, 부회장의 총애를 받아 직급에 상관없이 영업상 필요한 일들에 대해 많은 자율권을 행사할 수 있는 특권을 누렸다. 실적이 따라주니 회사 상사들도 팍팍 밀어줬다. 법인카드도 2개를 받아 필요한 대로 마음껏 사용했다. 주위에서 눈치를 줄라치면 당시 부회장이 “꿩 잡는 게 매”라며 방패막이가 돼 주었다. 월급보다 몇 배나 많은 활동비를 마음껏 쓸 수 있었다. 자신감 뿜뿜이었다. 임원들도 회장, 부회장 결재를 맡기 어려운 것은 김 대표 책상에 올려놓았고, 회장, 부회장은 김 대표가 가져오는 결재 서류는 얼굴만 보고 사인할 정도였다.

 

 

 

제지포장 박스 창업

 

2005년 오너 2세들이 입사하고 스펙과 능력에 한계를 느끼면서 김 대표는 퇴사를 결심하고 사직서를 제출했다. 회사에서는 계속 근무하라며 사표 수리를 해 주지 않다가 몇 개월이 지난 뒤에야 사표를 수리해 주었다. 회장은 사표를 수리해 주면서 “자네는 뭐든 잘 할 수 있을 거야”라며 응원해 줬다.

 

김 대표는 회사 생활을 하면서 40대 중반에 임원을 역임하고 회사를 차려서 내 사업을 해보는 것이 꿈이었다. 당시 선배들은 ‘나중에 남는 것은 사람’이라며 주위 사람들과 척지지 말고, 내 사람을 만들라고 조언했다. 

 

사업을 시작할 때 주위 지인들에게 조언을 구하고 이를 마음에 새겨 늘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덕분에 사업을 하며 급속한 성장을 하지는 못했지만 큰 어려움을 겪지 않고 견실한 운영을 할 수 있었다. “어음 받지 마라”, “한 집에 10% 이상 몰빵하지 마라”, “가까운 곳에 있는 거래선을 찾아라”, “손가락을 빠는 한이 있더라도 싸게 팔지 마라. 절박하면 뛰게 돼 있다”, “큰 곳에서 기웃거리지 마라” 등의 조언이었다.

 

사업을 시작한 초창기에는 아내와 직원 둘이서 낮에는 납품하고 밤에는 같이 박스를 만들며 고생한 끝에 3년 정도 지난 후에야 손익분기점이 나오고 답이 보이기 시작했다. 사업을 시작하며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더라도 직원들 월급과 거래처의 결제는 제때 해 주겠다고 다짐했었다. 사업을 시작한 지 2년쯤 지나니 퇴직금으로 버티던 자금이 바닥났다. 자존심 때문에 가족들에게 손도 벌리지 못하고 의왕에 있던 아파트를 팔고 전세로 바꾸면서 직원들 월급과 결제 대금으로 사용했다. “내 이름을 걸고 거래처 결제, 직원들 월급은 20년 동안 단 한 번도 미룬 적이 없어요. 그거는 내가 집을 팔아서라도 줬으니까요”라며 치열했던 옛날을 회상했다.

 

 

  © 화성신문



 

내 자신의 사고 깨는 것이 가장 힘들어.

 

사업을 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것을 묻자 “저는 제 사고를 바꾸는 것이 가장 힘들었어요. 이전에 근무했던 직장에서 많은 것을 누렸잖아요. 차 달라고 그러면 차 주고, 월급 100~200만원 할 때 법인카드로 400~500만원 썼는데, 그땐 고객들과 식사를 해도 최고급 집에서 하고, 술을 마셔도 양주를 마시는 것이 일상화 돼 있었어요. 우리 사주 공개할 때도 실권주들을 더 사서 몇 배로 이익을 남기기도 하고. 돈에 대해 별 아쉬움이 없었지요. 그래서 제 아이들이 ‘아빠는 입이 명동’이라고 합니다. 서산 촌놈이 입만 고급이 됐다는 거지요. 그런 것들이 20년 동안 몸에 배어 있었는데 내 사업을 차리니까 전부 제 돈으로 내야 되잖아요. 월급도 못 갖고 가던 시절인데 어디 가서 찬조하면 수십만원씩 대기업 수준으로 찬조를 하고 있더라고요. 어디 가서 깍두기에 국밥이라도 하나 먹으면 다행인데 여전히 고급 고깃집에 가서 먹고 있었어요. 이런 것을 바꾸기가 제일 힘들었어요. 어느 날 새벽에 출근하면서 잠자고 있는 집사람과 아이들을 보면서 순간 현실감이 확 들더라고요. 이렇게 해서는 안 되겠다고 깨달았어요. 이때부터 제 처지에 맞게 씀씀이를 줄일 수 있었지요”라며 스스로의 인식 바꾸는 것이 어려웠다고 설명했다.

 

 

 

기술영업으로 견실한 성장

 

“전체적으로 따지면 한 5년간은 적자 내지 자리매김, 이후 5년에서 10년간은 한 번도 적자 안 나고 조금씩 꾸준하게 성장했어요. 볼륨을 수십 배 이상 키울 수 있었던 기회는 많이 있었지만 매출 규모보다는 영업 이익률이 좋은 기술영업을 했지요. 영업사원 없이 까다롭기로 유명한 6~7곳의 외국계 회사들과도 꾸준한 거래를 할 수도 있었지요. 종이에 대한 충분한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더 견고하고, 더 저렴하게 만들 수 있는 제안을 하면서 신뢰를 얻었죠”라고 느리지만 견고한 경영 방침을 설명했다. 이런 제지에 대한 실력을 인정받아 한국박스산업협동조합 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기도 하다.

 

커피숍에서 플라스틱 1회용 빨대 대신에 사용하는 종이 1회용 빨대를 개발하는 데에도 기여했다. 종이로 만들면 물에 불려지는 게 단점인데 종이에 다시마로 만든 풀을 이용해 인체에 해롭지도 않고 물에 금방 풀어지는 단점도 개선한 특허를 만드는 데 일조하기도 했다.

 

제지포장 사업은 이익률이 높지는 않지만 성실하게 노력하면 먹고 사는 것은 보장된다는 믿음이 있었다. “최근 100년 동안 종이 사업은 마이너스 된 해가 없었어요. 1인당 종이 소비량이 선진국의 척도인데 100년 동안 마이너스가 된 적이 없어요. 남들이 볼 때는 R&D도 아니고 허드렛일 같지만 제가 머리가 비상한 것도 아니고 저에게는 이 사업이 딱 맞아요”라고 자신한다. 김 대표가 존경하고 그리워하는 그의 부친은 경주 김씨 집성촌이었던 서산시 음암면에서 농사를 짓다가 당진으로 이사해서 조경사업을 했다. 2005년도 김 대표가 사업자 등록을 내던 해에 부친께서 재능기부로 당진경찰서 조경을 하고 귀가하던 중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그는 김 대표가 어릴 때부터 “혼자 밥 먹지 말아라”, “어디 방문할 때는 빈손으로 가지 마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김 대표는 머리가 복잡하고 가슴이 답답할 때면 서산에 있는 아버지 묘소를 찾아간다. 늦은 밤이고 새벽이고 상관없이 달려간다. 가서 “아버지, 셋째 왔어요” 하며 절하고 한참을 앉아서 대화를 나누다 오곤 한다.

 

이상하게 아버지 묘소에 찾아가 대화를 하고 온 다음 날이면 뜻하지 않게 일이 술술 풀릴 때가 많았다. 한번은 급하게 5000만원이 필요해서 끙끙 앓고 있었는데, 아버지 묘에 다녀온 다음 날 김 대표의 얼굴을 본 지인이 “송환아 너 뭔 일 있어? 사업 처음 시작했으니까 그럴 수도 있지. 돈 없으면 이자는 안 받을 테니까 내 돈 갖다 써. 한 1~2억이야 못 주겠냐”라며 격려해 주었는데, 다음 날 거래처에서 예산치 않았던 선결재를 해 줘서 해결되기도 했다.  김 대표는 입사 10년째 되던 해, 회사에서 모범사원으로 뽑혀 해외여행을 갔다 왔다. 이때 좋았던 경험이 있어서 1년에 두세 번은 해외여행을 가겠다고 본인에게 약속했다. 박람회, 전시회 등 회사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어도 반은 견문을 넓히려는 목적, 반은 힐링하려는 목적으로 매년 다녀온다. 덕분에 많은 나라를 여행할 수 있었다. 특히 내공과 여유, 자긍심이 느껴지는 영국을 좋아한다. 고풍스럽고 오래된 집들에 담쟁이들이 편안하게 어우러져 있는 비버리 마을은 안정감이 있고 역사가 느껴져서 김 대표가 가장 좋아하는 곳이다.

 

2025년에 맞이하는 회사 설립 20주년에는 전 직원 및 직원 가족들까지 모두 함께 해외여행을 가려고 계획하고 있다고 말하는 김 대표의 얼굴에 미소가 감돈다.

 

 

 

남을 유익하게 하는 것이 최고의 삶

 

김 대표는 ‘남을 즐겁고 유익하게 하면서 사는 사람이 최고의 삶을 사는 사람이다’라는 말을 실천하려고 많은 노력을 해 왔다. 사업 초창기 운영 자금을 보충하기 위해 집을 팔아야 했던 어려운 시기에도 꾸준하게 아내와 더불어 Save The Children에 매월 기부를 지속해 왔고, 화성시새마을경제인협의회를 통해서도 어려운 이웃을 위한 봉사 활동을 지속해 왔다. 화성시새마을경제인협의회 회장을 역임하고 공로를 인정받아 국무총리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화신페이퍼텍의 슬로건은 ‘따뜻한 생각 행복한 우리’이다. 직장생활 할 때 ‘따뜻한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 행복하게 살더라’라는 것을 느껴서 다 같이 그렇게 살아야겠다는 마음으로 회사 탑차에 직접 이 문구를 썼다. 회사 로고도 김 대표가 직접 구상해서 만든 것이다. 예술적 DNA가 느껴진다. 추사 김정희의 후손이다.

 

 

 

세상은 더불어 사는 것

 

젊은 후배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말을 청하자 “자기 개발은 무조건 해야 하는 것이고, 멈추는 것은 결국 도태된다는 것이다. 또 늘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주위에 긍정적인 에너지를 주는 사람이 되라”는 것을 주문한다. 너와 내가 함께하면 우리가 되고, 우리가 같이 가면 동행이 되는 것처럼 세상은 혼자 갈 수는 없다. 더불어 사는 삶, 욕심내지 않고 주위 이웃들과 서로 베풀면서 채워가는 삶을 추구하는 김 대표의 따뜻한 마음이 함께하는 주위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바이러스를 퍼뜨려 모두 행복한 모습이 되길 기대한다.                                    

 

신호연 기자 news@ihsnews.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화성신문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인기기사목록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