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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정조대왕 초장지
 
화성신문 기사입력 :  2021/03/15 [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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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장심 융건릉 문화관광해설사     ©화성신문

초장지라함은 왕릉이 조성된 후 정치적인 이유나 풍수가 좋지않다는 이유로 왕릉을 보다 좋은 명당으로 천장하였을때 처음 왕릉자리를 초장지라 한다. 참고로 조선왕릉 전체 42기 중 15기의 왕릉이 천장된 예가 있다. 

 

정조대왕의 승하는 1800년 6월 28일 쌓인 정무와 과로로 인해 고질적인 부스럼 병이 크게 악화되어 승하하셨다고 실록은 전한다. 임금은 생전에 훗날 자신의 능은 아버지의 현륭원(융릉) 가까운 곳에 만들어 죽어서도 못다 한 효를 행하겠다는 유지를 남겼다. 야사에서는 아버지의 발끝에 묻히고 싶다고하였으나 ‘건릉산릉도감의궤’에는 건릉은 현륭원의 동쪽 두 번째 언덕 옛 강무당 자리에 모셨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21년 뒤인 1821년 왕비 효의왕후가 승하하여 왕비의 능을 선왕의 능 부근에 정하려 하자 당시 집권세력의 중심에 있던 김조순이 능침에 대한 풍수지리의 우려점을 상소해 알려 새로운 길지를 정해 지금의 건릉으로 천장하여 임금과 왕비를 합장하였다는 내용이 기록을 통해 알고 있는 내용이다.

 

정조대왕 초장지는 1차 2011년과 2차 2012년에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선후기 왕릉에 대한 발굴조사가 전무한 상황에서 이루어진 발굴조사 성과는 정비복원의 기초자료가 확보되었다는 점이다.

 

첫째, 볼록철(凸)자형 묘광과 그 주변 발굴로 정광(작은방)과 퇴광(넓은방)으로 구분 되는데 재궁(관)이 있던 정광에서 유물이 집중 출토되었다. 유물이라하여 진기명기의 유물이라기 보다는 크기가 3.5cm~13.5cm 정도의 묘에 들어가는 상징적인 명기들이 출토되었다.

 

둘째, 능의 광중 구조와 출토된 명기 유물들이 산릉도감의궤 등의 문헌자료와 거의 일치하였다.

 

셋째, 출토된 명기류가 일반 사대부 묘와는 등급이 다른 다양한 명기들로 궁중제례악에서 등장하는 백자편경, 청동편종의 악기 출토는 왕릉일 가능성을  높였다.

 

이밖에 건릉 조성 당시의 능상각, 수도각을 세웠던 자리와 능 주변의 석물들의 자리가 확인되었고, 특히 순조실록 1804년 6월 29일자에 능 위에 높고 가파른 곳이 있어 다시 평평하고 둥글게 하였다고 했는데 조사 결과 다량의 흙이 겹쳐 쌓아져 인위적으로 성토된 것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초장지 석물들의 대부분이 천장 된 건릉으로 옮겨 세워졌으나 능침 난간석의 죽석과 면박석 12개 모두가 출토 되었다. 이것은 천장 될 건릉이 합장릉으로 조성 됨에 따라 크기가 맞지 않아 초장지에 매립 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건릉산릉도감의궤>에 “옛광에 있던 좌향표석의 글자를 삭제하여 옛 능 안에 묻어두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라는 기록이 나오는데 출토된 좌향석이 2개가 겹쳐진 상태로 기록과 같은 크기와 글자를 정으로 쪼아 삭제된 상태 등이 모두 일치하였다. 이처럼 출토 결과가 문헌기록과 일치될 때마다 발굴조사에 참여한 문화재 연구원들은 놀랍고 감동적이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이리하여 2012년 2차 발굴조사를 마치고 조사지점이 정조대왕 초장지로 결론을 내렸다.

 

그동안 정조대왕 초장지는 융건릉 내에 위치하면서도 관람객이 진입할 수 없는 비공개지역이었다. 지난해 10월23일부터 최초로 관람로가 개방되어 왕릉해설과 왕릉발굴조사 과정을 보다 쉽고 재미있게 해설을 들을 수 있지만 현재 코로나로 인하여 해설이 중지되어 있어서 무척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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