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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읽는 세상 5] 이념을 대하는 자세
 
화성신문 기사입력 :  2023/09/18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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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비담 시인. 한국작가회의     ©화성신문

인간존재의 뒷어깨에 묻은 허허로움이 마음을 그득 채우는 순간이 있다. 그것을 본 뒤로 시인의 한 생애를 사로잡은 인간의 연민과 사랑이라는 이념이 생겨났다. 시인의 이념이란 그런 것 같다. 그런데 어떤 이념은 왜 동상을 쫓아내고 부관참시를 하고 살상을 일으키는가. 지난 수주 간 시대착오적인 이념논쟁이 안 그래도 비좁은 조각보 나라를 넝마 조각으로 만들어놓았다. 국방부가 멀쩡히 잘 있는 육사의 독립군 동상들을 이전시킨다는데 그 이유가 독립투쟁 당시 행보의 일부가 현 정권의 국가정치 이념과 맞지 않다는 데서 비롯한 논쟁이다.

 

 정치인들은 권력의 기반이 불안할 때마다 케케묵은 이념 문제를 들고나와 시비를 걸며 국민적 논쟁과 분열을 부추기곤 한다는 걸 모르지 않는다. 연이어 행정부의 수반일 뿐인 대통령이 이념 중심 정치를 노골적으로 선포하여 현 정부가 합심해 국가와 국민의 역사를 국난급 위기 상황으로 몰아가고 있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게 만든다. 정권의 세계관, 이념 등의 역학관계에 따라 동상이 이리 옮겨지고 저리 옮겨지는 일은 고래로 없는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백번 천번 양보하여 생각해봐도 그것이 나라와 역사의 근간을 왜곡하고 뒤흔드는 일이라면 두고 볼 수는 없다. 우리는 하나의 나라에 양분된 역사를 갖고 있는 비극적 분단 현대사를 지나오며 좌우라는 낮도깨비 같은 두 이념 사이에서 엎치락뒤치락하는 비운을 오랫동안 감내해 왔다, 이제 더 이상 국민이 합의하여 규명한 역사를 권력자들 자의에 따라 함부로 부관참시하는 악습의 ‘전통’을 이어가서는 안 된다.

 

이념의 대립이 극대화되면 이념 이외의 모든 것, 즉 인간은 인적자원으로, 주변 환경과 사물은 물적 자원으로 전락하게 된다. 우리는 그렇게 오도된 인적, 물적 자원들이 참혹한 인간학살에 동원될 수밖에 없게 된 사실을 역사를 통해 수없이 봐 왔다. 사랑과 평화를 말하면서 증오와 전쟁의 근원이 되었던 지독한 역설의 종교전쟁부터 좌우 이념의 극한 대립으로 자행된 한국전쟁까지 이념 중심 정치가 저지른 끔찍한 국가폭력들 말이다.

 

터무니없는 논란으로 나라가 혼탁할 때 우국근심을 스승으로 삼던 시인들을 떠올리게 된다. 그중 매천 황현 선생의 ‘난작인간식자인(難作人間識字人)’의 절명시 구절을 떠올리며 탄식이 더 깊어지는 시절이다.

 

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하기 어렵구나//백 년도 전 순절선비의 비탄이/ 시절의 등뼈를 곧추세운다//가을밤 서늘한 샘 가/야광명월 기다리던 매화 한 그루 마침내 졌다//국치에 물든 달의 낯빛/나뭇가지에 목을 걸었다//선연하다 가을 등불 아래 그 절의(節義)/붉은 낙화를 주워 꽃잎의 후기를 읽었다//매화는 망했어도 망국의 삼일독립만세 맹렬히 피워 올렸으나/용케 이른 해방공간에도 좌익우익 난작인간식자인*//부패한 선비들로 만신창이 나라/귀신의 무리 뿌리치고 낙향한 매천필하무완인*//백 년 전에 차오른 백 년 후/매화의 샘터가 텅 비었다//더 이상 할 말이 없다고 느낄 때/나는 이 시절의 시인이다//절명으로 망국의 치욕을 연명한 선비/연명으로 절명의 비분을 천명한 시인/목숨을 다해 시절의 수모를 책임진 매화의 유서를 받아들고//오늘/시인은 서로의 머나먼/어느 인간의 망국으로 떠나고 있나 

 

주)*難作人間識字人 : ‘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 하기 어렵구나’라는 매천 황현의 절명시구. 

 

*梅泉筆下無完人 : ‘매천의 붓 아래 온전한 사람이 없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매천은 대한제국 시기의 정치인들을 매섭게 비판했다.)

 

  -전비담 시 ‘황현’ (독립운동가 기림시집 ‘독립운동의 접두사’(공저) 게재)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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