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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택수 시인 칼럼 9] 나의 ‘화성 서해 답사기’를 기다리며
 
화성신문 기사입력 :  2023/09/11 [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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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택수 노작홍사용문학관 관장     ©화성신문

추상적인 공간을 구체적인 장소로 실감나게 경험하는 것이 문학의 역할 중 하나다. 문학이라는 렌즈를 통해 바라보면 데면데면하게 지나치던 일상과 풍경들에 초점이 모이게 된다. 마치 돋보기를 통과한 공중의 빛이 먹지 위에 모이면 불꽃을 피우듯이 말이다. 그것은 멈춤과 몰입의 기술이고 동시에 소비되기에 급급한 장소를 자기식으로 경험하는 자유의 방편이기도 하다.

 

 문학을 렌즈로 한 장소들은 하나의 감각적 사건으로서 망각의 공포를 이겨내는 힘으로서 세세연년을 유전한다. 가령 “옛날엔 통제사(統制使)가 있었다는 낡은 항구의 처녀들에겐 옛날이 가지 않은 천희(千嬉)라는 이름이 많다./ 미역오리같이 말라서 굴껍질처럼 말없이 사랑하다 죽는다”(「통영」)고 노래한 백석의 통영과 “나는 통영에 가서야 뱃사람들은 바닷길을 외울 때 앞이 아니라 배가 지나온 뒤의 광경을 기억한다는 사실, 그리고 당신의 무릎이 아주 차갑다는 사실을 새로 알게 되었다”(「환절기」)고 한 박준의 통영 사이에는 얼마나 놀라운 정서적 유대가 깔려있는가. ‘미역오리같이 말라서 굴껍질처럼 말없이 사랑하다 죽는다’는 슬프고도 아름다운 여성의 이미지는 시간을 뛰어넘어 2000년대의 젊은 시인을 호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적층을 통해 장소애가 발생한다. 장소애는 장소를 기억 속에 각인함으로써 그 장소를 강한 애착과 그리움의 대상으로 있게 한다. 가령, 내가 어릴 때 뛰어놀던 고샅길이나 강둑길은 단순한 통과의 공간이 아니라 풍화의 물리적 과정을 뛰어넘는 정서적 실체로 남아 있다. 어떤 장소는 신체의 일부처럼 친근해서 사라졌을 때는 환지통을 앓게 한다.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잃어버린 시공으로서 유년시절의 아름답고 행복한 고향에 대해 애착이나 그리움의 정서를 갖는 것이야말로 장소애의 보편적 전형이라 할 수 있는데 화성을 작품화한 문학에는 무엇이 있는가.

 

 오래 전부터 품어온 화두를 실천하기 위해 구월의 첫날을 전국에서 모인 작가들과 함께했다. 경북 예천에서 온 안도현 시인과 언론인 고두현, 여행작가 최갑수 그리고 소설가 김종광, 한지혜를 포함하여 화성작가회의의 맹원들과 유지선 화성문화원장, 카메라와 펜으로 중무장한 젊은 작가들이 일박 이일 동안 화성의 서쪽을 샅샅이 누볐다. 3.1운동 만세길로부터 시작하여 공생염전과 우음도, 매향리와 궁평항을 지나 아름답기로 이미 소문이 자자한 옥란재에 이르기까지 화성의 멋과 맛에 흠뻑 젖어든 시간이었다.

 

용인에서 참여한 김종경 작가는 화성의 갯벌에 넋을 잃은 나머지 일박 이일만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다며 행사 전부터 십여 회를 웃도는 답사력을 자랑하였다. 그가 화성호의 저어새와 농섬의 검은머리물떼새와 알락꼬리마도요를 알현키 위해 시간대와 날씨를 달리하여 탐조여행을 시작한 이야기는 그 자체로 아름다운 행위예술이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 누군가는 그날의 풍광을 시로 읊조렸고, 또 누군가는 발효를 위한 깊은 묵상에 들어갔고, 입심 좋은 모 소설가는 포복절도할 판소리체 서사로 밤을 새워 이야기를 엮어 나갔다.

 

같은 대상이라도 각도가 달라지면 사물 세계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경이로서 현현한다. 마치 대기와 계절의 변화에 따라 천변만화하는 서해의 물빛처럼. 일상이 여행지로 바뀌는 마술이 이렇게 가능해진다. 화성시의 인문지리를 살피는 과정에서 이제 작가들은 장소상실의 시대를 성찰하고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새롭게 사유하는 다른 각도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가을의 한복판에서 결실을 맺게 될 작가들의 ‘나의 화성 서해 답사기’가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장소 마케팅과 소비가 일상인 시대에 시와 소설 그리고 에세이를 읽으며 화성의 서쪽으로 기행을 떠나는 여행자들 사이에 다시 서 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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