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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홍난파 다시보기 1. 홍난파의 출생 연도는?
 
화성신문 기사입력 :  2023/09/04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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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도성 홍난파합창단원 /시민기자.     ©화성신문

- 나운영의 주장- 1897년 출생, 홍난파의 제자 중에 작곡가 나운영(羅運榮)이 있다. “민족혼이 살아있는 음악을 작곡해라, 너만의 음악을 해라.” 일제강점기 동아신춘문예 작곡 부문 심사위원 홍난파는 대회에서 입선한 나운영에게 이러한 교훈을 주었다. 해방 이후 나운영은 ‘홍난파 선생 추모회’ 모임을 추진하였고 그의 13주기일인 1954년 8월 30일 서울 향초다방에서 추모 모임을 갖는다. 모임에 참석한 이들은 김영환, 김성태, 독고선, 이영세, 정사인, 현제명 등 홍난파와 함께 음악 활동을 했던 음악인들이다. 나운영이 편찬한 추모회 소책자에서 홍난파의 출생 연도를 ‘1897년 3월 수원 남양읍에서 출생함, 1905년 상경함’으로 기록하였다. 그러나 6·25 전쟁 직후인 당시에는 자료들이 부족하고 모든 연구나 정비가 제대로 안 되었기에 홍난파의 출생에 관한 나운영의 당시 주장은 음악계에서는 그대로 사실로 받아들여졌다. 이후 음악연구가들이 홍난파의 연보를 작성할 때 나운영이 주장한 1897년 출생하였다는 내용을 인용하였다. 많은 신문과 방송에서도 홍난파의 출생 연도를 나운영의 주장대로 1897년이라고 알려주었다. 

 

이러한 현상은 급기야 홍난파가 출생한 지 100년이 되는 해를 1997년으로 알고 난파 탄생 100주년 기념음악회를 열기도 하였다. 그러나 1997년 난파 탄생음악회가 열리던 무렵에 일부 음악학자들은 홍난파의 출생 연도와 서울 상경 시기를 달리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홍난파 출생 연도에 대한 결정적인 근거인 홍난파의 자필 이력서가 알려졌다.

 

 

- 자필 이력서- 1898년 출생, 홍난파가 1939년 1월에 작성한 자필 이력서에는 ‘명치 31년(1898년) 3월 19일생’ ‘1904년부터 1910년까지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라고 적혀있다. 출생 연도는 1898년 3월 19일을 음력으로 보았을 때 양력으로 환산하면 정확히 4월 9일이 된다. 그런데 사람들에게는 1898년 4월 10일로 알려졌고 매해 4월 10일을 홍난파 탄생일로 기억한다. 홍난파의 자필 이력서 이외에 여권, 일본 유학 입학원서와 학교에서 발행한 졸업증명서, 홍난파의 흥사단 입단 이력서에도 1898년으로 되어 있다. 1997년에 난파 탄생 100주년 기념음악회를 개최했던 음악인들은 이듬해인 1998년에 난파 탄생 100주년 기념음악회를 다시 개최할 수밖에 없었다. 내용을 모르는 분들은 어리둥절하겠지만 그의 음악적 업적을 기리는 탄생 100주년 기념음악회 객석에는 홍난파를 좋아하는 사람들로 만원을 이루었다.

 

1998년 4월 12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난파 탄생 100주년 기념음악회에는 금난새가 지휘하는 수원시립교향악단과 바이올리니스트 김남윤 등의 음악가가 무대를 장식하였다. 4월 14일에는 경기도 문화예술회관(문화의 전당) 대공연장에서 신동렬이 지휘하는 수원시립교향악단과 박흥우가 지휘하는 난파소년소녀합창단이 홍난파의 동요를 불렀다. 이러한 전통을 이어받아서 화성시 음악협회는 매년 4월 난파 탄생(생가)음악회를 개최해 왔다. 올해도 지난 4월 8일 남양읍 활초리에서 난파 탄생 125주년 기념음악회를 개최했다. 음악을 사랑하고 난파를 사랑하는 100만 화성시민께서 난파 탄생음악회에 보내주신 성원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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