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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읽는 화성 4] 겹쳐 쌓인 시간과 존재의 깊이 - 김명철의 시 「화석지에서」
 
화성신문 기사입력 :  2023/09/04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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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휘민 시인/ 화성작가회의 사무국장     ©화성신문

매미 소리가 사라져간 자리에 귀뚜라미 소리가 찾아들었다. 무더웠던 여름이 끝났다는 신호다. 이제 겨우 가을의 문턱을 넘어섰을 뿐인데 마음은 저벅저벅 달력을 가로질러 호젓함을 마중하러 간다. 봄을 기다리는 마음이 신생에 대한 기대와 설렘을 담고 있다면, 가을을 기다리는 마음에는 기울어지는 것들에 대한 연민과 고독이 깃들어 있다. 기꺼이 쓸쓸함을 견디며 내게서 멀어지는 것들과 눈을 맞춰보려는 용기. 만약 소슬바람이 옷깃을 스칠 때 이런 마음이 살포시 찾아든다면 당신도 시인이다. 아마도 철학자들이라면 이러한 행위를 존재론적 성찰이라 부를 테지만.

 

공룡알 화석지로 향하는 길을 따라/갯달래가 꽃망울을 밤하늘의 불꽃처럼 터뜨리고 있었네//말도 글도 갈수록 퇴화되어/ 오래전에 서로의 수심 깊이 묻어두었던/작은 알돌들은 여전히 식어가고//백 년도 아니고 천 년도 아니고/천만 년에 천만 년을 열 번 더하는 시간이란 뭘까//내가 당신 속으로/당신이 내 속으로 들락거리던 그때 그대로의 모습으로/우리도 화석이 될 수 있을까/퇴적과 지층 퇴적과 지층 퇴적과 지층//지층들 사이에서 부화를 기다리고 있을 알돌들//당신은 갯벌에 묻혀 있는 알들이/언젠간 부화할 것이라고 이 빙하기가 끝나면/언젠간 눈을 떠 맑고 투명한 손톱을 드러낼 것이라고 하였네/노을은 기울어지고 있는데/화석이 되어가는 갈대숲 가을의 사이 길을 따라 당신은 노을의 반대편으로 사라지고//둥지에서 벗어난 알 하나가 먼 지평선 쪽으로 눈을 돌리고 있었네//천 년이란 게 하찮다는 듯

 

- 김명철, 「화석지에서」 전문

 

 

공룡알 화석산지는 화성에서 가을을 마중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다. 그곳에 가면 겹겹이 쌓인 시간의 흔적과 존재의 깊이를 만날 수 있다. 김명철 시인의 「화석지에서」는 송산면 고정리에 있는 한국 유일의 공룡알 화석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1억 년 전 공룡의 흔적이 남아 있는 화석지에서 시인이 과거가 아니라 당신과 나의 미래를 그려본다는 사실이다. 신생대 말기 홀로세를 살아가는 인류에게 “천만 년에 천만 년을 열 번 더하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 만날 수 있는 중생대 백악기는 얼마나 까마득한 과거인가. 그러나 시인은 비록 돌이 되느라 유기질의 속성은 사라져 버렸지만 껍질에 난 작은 구멍들 사이로 고운 숨을 내뱉던 따스했던 알들의 존재는 여전하다고 말한다.

 

우리는 “퇴적과 지층 퇴적과 지층 퇴적과 지층”으로 반복되는 무수한 날들 속에서 살아간다. 그 모습이 어제와 별반 다를 바 없지만 다가올 내일이 있기에 우리는 모두 삶이라는 지층 앞에 서 있는 영원한 잠재태들이다. “지층들 사이에서 부화를 기다리고 있을 알돌들”이다. 그러므로 “갯벌에 묻혀 있는 알들이/언젠간 부화할 것이라고 이 빙하기가 끝나면/언젠간 눈을 떠 맑고 투명한 손톱을 드러낼 것이라”고 믿는 당신이 있는 한 공룡알 화석의 현존은 생명을 품은 잠재태가 될 수 있다. 여름 한철을 살기 위해 콩과 옥수수가 오랜 시간을 씨앗의 상태를 견디듯이, 자연 상태의 물질에게 죽음으로 해석되는 운동 정지 상태가 더 보편적인 현실태일 수 있듯이.

 

영원한 것은 없다. 변하지 않는 것도 없다. 그러나 유기물이든 무기물이든 생명의 본질은 사랑, 그 하나다. 지금도 수천 수억의 별들이 피고 지는 저 드넓은 우주처럼 지구라는 ‘창백한 푸른 점’ 속 작디작은 먼지에 불과한 우리의 삶에도 무수히 많은 꽃들이 피고 지고 또 바람이 불 것이다. 우연과 필연이 장난처럼 겹치고 엇갈리는 스펙터클한 사랑의 서사, 그 주인공이 바로 당신과 나다. 봄꽃처럼 설레는 만남도 낙엽처럼 쓸쓸한 이별도 모두 그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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