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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호 교수의 Leadership Inside 238]
대를 이어 기념비적인 다리를 완성한 사람들
 
화성신문 기사입력 :  2023/01/09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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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영호 아주대학교 명예 교수/수원시글로벌평생학습관장     ©화성신문

미국 뉴욕은 5개의 자치구로 되어 있다. 맨해튼, 브루클린, 퀸스, 브롱크스, 스태튼 아일랜드 등 말이다. 그런데 19세기 맨해튼과 바로 곁에 있는 브루클린은 모두 활발히 움직이는 지역이었는데 둘을 가르고 있는 이스트 리버(East River)가 넓고 물살이 세서 다리를 놓지 못하고 배를 이용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다리를 꼭 놓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현수교를 설계하여 나타난 사람이 있었다. 독일 출신 존 로블링(John Roebling)이었다.

 

그렇게 하여 뉴욕의 브루클린 브리지(Brooklyn Bridge)는 1870년 1월에 착공하여 1883년 5월 24일 개통하였다. 

 

13년이나 걸려 만들어진 이 다리는 여러 가지 기록을 가지고 있다. 다리의 총 길이가 1.8km이고 폭이 26m나 된다. 그중 현수교의 길이는 487m나 되는데 여기에 강철선을 여러 개 꼬아 만든 당시 최장의 현수교로 기록되어 있다. 수면 위 높이가 84m나 되어 배가 지나갈 수 있다. 그리고 교각을 세우기 위해 케이슨(Caisson)이라는 직사각형 목재 틀을 사용하였다. 이 틀을 물속에 넣고 압축공기를 주입하여, 그 속에서 현대적 기계장비를 사용하지 않고, 순전히 인간의 힘으로 건설한 다리이다.

 

차도가 왕복 6차선으로 되어 있으며, 차도 만들기도 힘든데 중간에 인도까지 있다. 이 다리가 140년 이상 온전히 사용되고 있는 이유는 건축 당시 예상되는 교통량의 6배나 지탱할 수 있도록 설계했기 때문이다. 대단한 스케일이 아닐 수 없다. 미국인의 이 다리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하다. 매년 7월 4일 미국 독립기념일에는 이곳에서 불꽃놀이를 한다.

 

브루클린 브리지 건설에는 사연이 많다. 우선 공사에 13년이나 걸렸다는 사실이 이를 방증해주고 있다. 맨해튼과 브루클린을 잇는 다리가 1900년대 초에 2개 더 건설되는데 1903년 개통된 윌리엄스버그 브리지는 7년, 1909년 개통된 맨해튼 브리지는 8년 걸렸다. 첫 번째 시련은 존 로블링의 사망이다. 브루클린 브리지의 최초 설계자이며, 뉴욕시장과 투자자들을 설득한 존 로블링이 공사를 시작하던 해 페리와 선착장 사이에 다리가 끼는 사고를 입고 파상풍으로 목숨을 잃었다. 존은 현수교 제작의 특허도 가지고 있었으며, 이 다리 건설을 위해 사실상 10년 이상을 준비해 오던 인물이었다. 

 

아버지의 빈자리는 컸지만, 32세인 존의 아들 워싱턴 로블링(Washington Roebling)이 그 뒤를 잇기로 했다. 워싱턴 역시 아버지에게서 토목공학을 배운 엔지니어였다. 사실 브루클린 브리지를 설계할 때도 워싱턴이 이미 관여를 했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남기고 간 것은 디테일한 설계도가 아니었다. 워싱턴이 세부 사항을 그려야 했으며, 현장에서 나타나는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그리고 워싱턴은 그 스스로 물속 작업장인 케이슨에서 작업지시를 했다. 그런데 고압 상태인 케이슨에서 수상으로 너무 빨리 오르다 보니 몸이 적응할 수 없었다. 결국 잠수병(감압병)에 걸리고 만 것이다. 그는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존에 이어 워싱턴도 이 지경이 되자, 이번에는 워싱턴의 부인인 에밀리(Emily)가 나섰다. 에밀리는 처음 남편의 심부름만 했다. 말도 제대로 못 하는 남편이었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소통 방법이 있었다. 그리고 워싱턴은 침실에서 망원경으로 공사장을 살펴볼 수는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에밀리의 역할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현장에서는 크고 작은 문제가 계속 생겼고, 에밀리가 바로바로 결정할 일이 많았다. 그리고 남편과 상의를 한다고 하더라도 남편도 어쩔 수 없는 것이 많았다.

 

가정주부였던 에밀리는 그때부터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고등수학도 공부하고, 토목공학도 공부하고, 강재에 대해서도 연구했다. 그는 누구보다 전문적인 지식을 쌓았고 스스로 엔지니어가 되었다. 그러나 주위에서는 에밀리의 역할이 커지는 것을 불안해 했다. 형식적으로는 에밀리의 남편 워싱턴이 책임 엔지니어지만 사실상 에밀리가 그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남편을 프로젝트에서 배제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에밀리는 여기서도 외교술을 발휘하여 위기를 넘겼다.

 

여성에게 투표권도 없었으며, 양갓집 규수는 패티코트나 입고 다니던 시절, 에밀리는 11년이나 공사현장에 드나들었다. 총 공사기간 13년 중 11년이나 말이다. 브루클린 브리지가 개통되었을 때 맨 먼저 이 다리를 건넌 사람은 다름 아닌 에밀리였다. 승리의 상징인 수탉을 들고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밀리의 공을 제대로 인정한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뉴욕타임스는 2018년, 1903년 사망한 에밀리 로블링의 사망 기사를 새로 싣고 그의 삶을 재조명했다. 로블링가(家)는 비극에 굴하지 않고 위대한 성취를 이루어 냈다.

 

choyho@ajo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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