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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호 교수의 Leadership Inside 235]
기업가 정신으로 신문을 팔던 소년
 
화성신문 기사입력 :  2022/12/12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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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영호 아주대학교 명예 교수/ 수원시글로벌평생학습관장     ©화성신문

6·25 때 그는 14살이었다. 6남매 중 4번째였지만 그는 가장 역할을 해야 했다. 아버지가 납북되었고 형들은 군대에 입대해 있었다. 어머니와 동생 둘의 생계를 챙겨야 했다. 그는 신문팔이로 나섰다. 신문을 받아 들면 곧장 대구 방천 시장으로 뛰어갔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데로 가야 한 장이라도 더 팔 수 있기 때문이다. 똘똘한 그는 항상 시장에 1등으로 도착하여 신문을 팔기 시작했다.

 

그런데 시장에서 신문을 팔고 있다 보면 어느새 다른 신문팔이 아이들이 나타난다. 그리고는 그 아이들이 자신을 앞질러 신문을 팔고 있다. “좀 더 빨리 움직일 수 없나?” 그는 궁리했다. 하루에 100장은 팔아야 네 식구 끼니를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거스름돈을 미리 준비했다. 삼각형으로 거스름돈을 미리 접어서 주머니에 가득 넣고 있다가 필요할 때 잽싸게 꺼내주면서 앞으로 빨리 전진해 갔다. 

 

그렇게 했더니 다른 아이들을 많이 따돌릴 수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빨리 간다고 해도 시장을 3분의 2쯤 가면 다른 아이들이 자신을 앞질러 가고 있었다. 

 

그 아이들까지 따돌리는 방법을 연구했다. 그는 아예 신문값을 받지 않고, 그냥 신문만 던져 주고 나서 나중에 거꾸로 돌아오면서 느긋하게 수금하였다. 물론 신문값을 떼이는 일도 있었지만, 그래도 그 방법이 최선이었다.

 

대구 방천 시장에서 신문을 팔던 그 아이는 1970년대 이제는 어엿한 사업가가 되어 있었다. 그가 이번에 찾은 시장은 아프리카였다. 선진국에 가서 물건을 팔 수 있으면 좋겠지만 거기서 장사를 하는 것은 어려웠다. 이미 다른 나라 기업들이 선점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에게는 신흥시장이 필요했다. 아프리카는 선진국 사람들이 들어가서 일하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그들은 이미 고급화되어 있어서 아프리카 같은 오지에서 버티기가 힘들었다. 일본 사람조차도 아프리카를 노렸지만 제대로 침투를 못하고 있었다.

 

아프리카 지도를 놓고 제일 큰 나라 그리고 돈이 좀 있어 보이는 나라를 골랐다. 수단, 나이지리아, 리비아 같은 나라로 들어가기로 했다. 우선 수단을 목표로 삼았다. 처음에 수단에 가지고 간 물건은 타이어였다. 아시아와 중동에서 이미 타이어를 팔아 보아서 자신감이 있었다. 그런데 수단은 당시 우리나라와 국교가 맺어져 있지 않았다. 오히려 북한과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 정부 쪽과 이야기했더니 정부도 수단과 수교를 원하고 있었다. 그래서 정부 관리하고 같이 수단으로 들어갔다. 1976년 4월 수단 정부의 장관들이 모이는 가든파티에 참석하게 되었고, 누메이리 대통령을 접견하게 되었다.

 

덕분에 수단과 한국이 영사 관계를 수립하게 되었고, 그는 수단 영빈관 건설공사를 수주했다. 그리고 나아가서 타이어 공장도 건설했다. 그 타이어 공장은 수단 최대의 공장이었고, 국내 소비는 물론 수출까지 하는 공장이 되었다. 수단 타이어가 이집트에까지 가게 되었다. 국민의 자부심이 높아졌다.

 

신문팔이 소년은 수단에 머무를 수가 없었다, 그는 이제 리비아를 겨냥했다. 당시는 해외 건설시장을 새로 개척하면 다른 시장에 진출할 수 있는 우선권을 정부가 주었다. 수단 시장을 개척한 대가로 리비아로 갈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1977년 벵가지의 가리우스 의과대학공사를 땄다. 그런데 트리폴리에 다른 의과대학공사를 진행하고 있던 이탈리아 건설업자보다 1년 늦게 시작했는데 준공은 1년 먼저 했다. 리비아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여세를 몰아 부스타 비행장, 우조 비행장을 연이어 수주했다. 이 건설 현장에서 한국인들이 너무나 열심히 밤 낮을 가리지 않고 일을 하니 카다피 대통령까지 현장을 방문했다. 그냥 둘러보고 간 것이 아니라, 열흘이나 현장에 머물면서 직원들과 탁구도 치고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카다피는 한국 회사와 녹색혁명을 이루고 경제개발도 하겠다고 선언했다. 한국과 리비아 간 수교도 이렇게 해서 성사되었다.

 

신문팔이 소년은 이후 리비아 공사를 싹쓸이 하다시피 했다. 그 후 20년 동안 리비아 도로의 3분의 1을 건설했으며, 주택 1만 5천 세대를 지었고, 학교도 270개나 건설했다. 이것만이 아니다. 시멘트 공장, 제철소, 화력발전소, 섬유공장, 오수처리 시설, 병원, 호텔도 지었다.

 

14살에 방천 시장에서 신문을 팔던 소년은 김우중이다. 그는 사업을 시작한 이후 하루도 쉬지 않았다고 했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고 외쳤다. 비약적으로 변화하려면 희생이 있어야 한다고도 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기업가 정신으로 무장한 사람이었다.

 

choyho@ajo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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