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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 가인(佳人) 박미연 국제로타리 3750지구 총재
“열세 살 소녀 주부, 국제로타리 지구 총재 됐죠”
“오빠 동생들 도시락 싸며 뒷바라지, 소명이자 효도로 생각”
1인 4역 억척스러운 삶, 한국 최초 한복 대여 ‘아름방’ 대표
사업 잘 되고 남편 승진, “사회에 갚을 생각하다 로타리와 인연”
로타리 입회 18년 만에 총재 취임, “후회 남지 않도록 미친 듯 최선”
 
김중근 기자 기사입력 :  2021/07/16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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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인 박미연 국제로타리 3750지구 총재가 포부를 밝히며 환하게 웃고 있다.


  

열세 살부터 오빠 둘과 남동생 둘, 그리고 자신의 도시락까지 다섯 개의 도시락을 싸며 중학교를 다니던 소녀 주부가 지난 71일 세계에서 명문으로 꼽히는 국제로타리 3750지구의 총재가 됐다. 50년 세월은 가녀린 소녀를 강한 여전사로 변모시켰다.

 

41녀 중 외동딸로 태어난 소녀는 섬마을 초등학교 교사였던 강직한 아버지와 그 아버지를 하늘처럼 모시며 억척스럽게 가정을 꾸려온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자랐다. 그런 부모의 유전적 형질은 소녀의 인생에 고스란히 배어 나왔다. 성실과 도전정신, 배려의 모양이었다.

 

정말 열심히 살았어요. 아내로, 며느리로, 엄마로, 생활인으로, 14역을 하며 억척스럽게 살아왔습니다. 복이 많아 이렇게 한복 만드는 회사인 아름방도 운영하고 있고, 영광스럽게도 국제로타리 지구 총재까지 되었네요. 돌아보면 모든 게 고맙고 감사한 일밖에 없어요.”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뜻의 가인을 아호로 가진 박미연 총재는 1958년 신안군 장산면에서 태어났다. 섬마을 초등학교 교사였던 아버지를 따라 어린 시절에는 섬에서 자랐다. 어머니는 쉴 줄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어디를 가든 주변의 노는 밭에서 농사를 지었다.

 

중학교 진학을 위해 목포로 나왔다. 자취생활을 하면서 여섯 살 차이나는 큰 오빠와 두 살 차이 둘째 오빠, 두 살 아래 남동생과 여덟 살 차이 막내 남동생 도시락까지 다섯 개의 도시락을 쌌다. 고사리 손으로 김장을 담근 날이면 손아 아파 밤새 울었다. 연탄불이 꺼질까 맘고생도 많았다.

 

 

▲ 총재 제복 차림으로 자신이 만든 한복 앞에서 사진촬영을 위해 포즈를 잡고 입는 가인 총재.


  

고교 졸업 후 7년 만에 대학 입학

 

목포중앙여중, 목포여고를 나왔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학교에서 밖에 다닐 때 사복을 입으면 안 된다고 해서, 하교 후 집에서 사복을 입고 있다가도 시장에 배추를 사러 갈 때는 교복으로 갈아입고 나갈 정도로 순진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스물세 살의 나이가 되어서야 동생 뒷바라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아버지가 도시에서 교사생활을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여자는 당연히 그래야 되는 줄 알았어요. 내가 집안 살림을 하지 않으면 우리 집이 큰 일 나는 줄 알았어요. 사명감이었어요. 부모님께 효도한다는 생각으로 정말 성실하게 열심히 했어요. 어머니는 아버지가 월급 타면 멸치 3키로 짜리 한 포대 갖다 주고는 아버지한테 돌아가셨어요. 다른 사람들은 엄마들이 도시에 있고, 아버지들이 일주일에 한 번씩 도시로 나와서 반찬 갖고 들어가시는데 우리 부모님은 반대였어요. 그때 멸치를 많이 볶아서 그런지 지금도 제일 잘하는 반찬이 멸치볶음입니다.”

 

어릴 때부터 손재주가 좋았다. 미술시간에 공예품을 만들면 선생님이 탐이 나서 가져가 버릴 정도였다. 고등학교 졸업 후 동생들 뒷바라지 하느라 직장을 다닐 수도 없었다. 양장을 배우고 싶어서 어머니에게 지원을 요청했지만 다른 건 다 지원해도 그것만큼은 안 된다며 거절하셨다. 그 당시 양장점이 많았는데 양장점 남편들이 놀고먹는다며, 가위질 하는 직업이 팔자가 세다는 것이 반대 이유였다.

 

백과사전을 펴놓고 혼자서 배워가며 만들어 입었어요. 양장점 아줌마들이 놀라요. 배우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그렇게 옷을 잘 만드느냐고. 몇 년 지나니까 시에서 운영하는 문화센터가 생겼어요. 돈도 되게 쌌어요. 거기서 배웠어요. 1980년도에 광주로 올라가서 시험을 봐서 나 혼자 유일하게 기능사 자격증을 땄어요. 머리를 썼죠. 시간 내에 완성을 해야 하잖아요. 시간이 5분 남았다고 알려주면 빨리 마무리해야 해요. 완성된 것만 대상으로 점수를 주거든요. 밑단을 떠야 하는데 5분밖에 안 남은 거예요. 풀로 붙여서 듬성듬성 떴어요. 일단 완성은 됐잖아요. 나는 하단 점수만 감점 받으면 되고. 합격했죠. 무슨 일을 하든지 지혜가 있어야 해요.”

 

박미연 총재는 83학번이다. 1976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7년 만에 대학생이 됐다. 어려운 가정형편 탓에 동생을 돌봐야 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목포에서 교사생활을 하게 된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스물다섯의 나이였다.

 

한양대 안에 한양여대가 있었어요. 전문대에 간 거죠. 의류학과였어요. 아슬아슬하게 합격한 것 같아요. 열심히 공부했죠. 졸업할 때는 과수석이었어요. 졸업 후에는 바로 방송통신대 가정학과에 3학년으로 편입했어요. 방통대 졸업 15년 후인 2002년 가을학기에 경희대 대학원 경영학과에 들어갔어요. 제가 99년도부터 체인사업을 시작했는데 그 당시에 체인점이 서른 개 정도 됐어요. 경영하는 법을 배워야겠더라고요. 20052월에 졸업했어요. 그리고 다시 10년의 세월이 흐른 2012년도에 사이버대학교에 들어갔어요. 한복복식과학학과였어요. 편입 안하고 1학년으로 들어갔어요. 한복과 관련된 것들을 기초부터 차근차근 배웠어요. 결국 저는 대학을 두 번 다닌 거죠.”

 

 

▲ 지난 7월 1일 3750지구 총재로 취임한 가인 박미연 2021-22년도 총재가 오죽 이정석 이임 총재로부터 이양 받은 3750 지구기를 힘차게 흔들고 있다.


  

정말 사랑하는 것을 깨닫다

 

대학교 1학년에 입학한 1983년 그해 12월에 결혼했다. 2학년 기간을 임신해서 배가 부른 상태로 다녔다. 1년간 쉴 생각도 했지만 1학년 때 과수석을 한데다 장학금까지 받게 돼서 몸이 무겁지만 학업을 계속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대기업에 다니던 남편은 538남매 중 막내였다. 시어머니가 마흔셋에 낳은 늦둥이였다. 목포에서 만나 6년 연애 끝에 결혼했다. 결혼 전 남편이 말했다. 앞을 못 보는 우리 어머니가 너무 불쌍하다고. 앞으로 3년을 사실지 5년을 사실지 모르지만 같이 모시고 살았으면 좋겠다고. 시어머니는 백내장을 방치해 시력을 잃은 상태였다.

 

남편이 막내라 안 모셔도 되죠. 그때는 사랑스러워서 다 해주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모시겠다고 했죠. 결혼 25년 만에 돌아가셨는데 20년을 모셨어요. 정말 힘들 때는 남편에게 ‘3년이 도대체 몇 번 지나간 가야라며 투정을 부리기도 했어요. 연년생 아이 키우랴, 앞 못 보는 시어머니 봉양하랴, 남편 챙기랴, 부업하랴, 지금 생각하면 그 때 우울증이 왔던 것 같아요.”

 

놀고먹지 못하는 성격이라 힘든 상황에서도 집에서 미싱 부업을 시작했다. 의외로 많은 돈을 벌었다.

 

큰 아이 태어나고 나서 5개월 만에 집에서 홈패션을 시작했어요. 홈패션이 유행이었거든요. 그 당시에는 모든 걸 뒤집어씌우던 시절이에요. 화장실 변기 커버까지. 가구가 헌 거라서 가리고, 새 것이면 보호하려고 덮어씌우고 그랬어요. 나는 인체에 옷을 입히는 양장을 하던 사람이잖아요. 홈패션은 일도 아닌 거예요. 원래 양장점을 차리려고 했었는데 양장점들이 기성복에 밀려서 문을 다 닫았어요. 그래서 홈패션을 붙잡은 건데 너무 쉬웠죠. 일거리가 너무 많았어요. 돈 벌면서 공부하느라 바빴죠. 제가 얼마나 악착같이 살았는지 아시겠죠. 호호호.”

 

아름홈패션. 아이들이 대여섯 살이던 1989년도에 수원시 장안구 동신아파트 옆 동신프라자에 차린 매장 이름이다. 미싱사 한 사람 두고 학원생들도 가르쳤다.

 

집에서 홈패션 5년 하다 밖에 매장을 차렸어요. 매장 차린 지 5년쯤 될 무렵 규격화된 상품이 나오기 시작했어요. 베개 사이즈도 규격화되고 이불 사이즈도 규격화됐어요. 침대 위에 까는 패드를 서울에서 8000원에 사오는데 어느 날 백화점 앞에서 7000원에 파는 거예요. 그때 깨달았어요. 영원한 건 없는 거라고. 수작업하는 사람이 대량생산에는 게임이 안 되는 거잖아요. 홈패션 시대가 끝난 걸 직감했죠.”

 

서른일곱이던 어느 날 자궁에 근종이 생겨서 수술을 받았다. 가게를 정리했다. 수영을 하며 몸을 회복시켰다. 몸이 회복된 후 어느 날 그 꼴도 보기 싫었던 미싱 앞에 앉아서 뭔가를 만들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미싱 기계로 하면서도 대량생산에 밀리지 않는 게 뭐가 있을까 고민했다. 한복이 떠올랐다. 한복을 배우게 된 직접적인 동기가 됐다. 

 

제가 가만히 있지를 못해요. 뭔가 진취적인 일을 하지 않으면 병이 나요.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된 후 미싱 앞에 앉아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 내가 정말 사랑하는 것이 미싱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작품을 만들어서 누군가에게 선물하는 게 너무 재미있는 거예요. 40평 규모의 자수학원을 차렸어요. 홈패션, 양장, 한복,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가르쳤어요. 제자 양성을 많이 했는데 그 사람들이 배우기만 하고 돈벌이를 못하는 거예요. 어떻게 하면 일거리를 만들어 줄 수 있을까 고민했어요. 그래서 설립한 게 아름방입니다.” 

 

 

▲ 박미연 총재 사업장인 ‘아름방’ 1층에 걸린 리본과 꽃송이들. 각 지역 순방 때 로타리클럽 회장들이 기념으로 전달한 클럽 이름이 적힌 리본과 꽃 한송이들을 한 곳에 모았다.

 

 

‘IT 총재애칭 가진 배려의 여왕

 

1995, 보증금 1000만 원에 월세 30만 원으로 수원에 다시 매장을 열었다. 지금의 아름방이라는 이름은 그때 지어졌다. 기성복을 만들어서 갤러리아백화점 오픈 매장에도 들어갔다. 제품을 진열해야 했기 때문에 제자들의 손길이 필요했다.

 

아름방 박미연 대표는 우리나라 최초로 한복 대여사업을 시작한 사람이다. 저고리를 벗으면 더 아름다운 드레스형 한복을 통해서다. 양장을 꿰뚫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지인이 빌려달라고 해서 빌려줬는데 옷이 예쁘다는 소문이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손님들이 몰려들었다. 첫 손님에게 대여한 금액은 3만 원. 한복 대여 사업은 그렇게 우연하게 시작됐다.

 

대여 사업을 하고 있던 중에 어떤 사람이 똑 같은 옷을 네 벌 만들어 달라고 하는 거예요. 매번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야 하는데 똑 같은 옷을 만들어달라는 게 자존심이 용납을 안 하는 거예요. 계속 되는 부탁에 어쩔 수 없이 만들어 줬어요. 뷔페에서 잔치를 연 사람들이 입었는데 그게 대박이 난 거예요. 여기저기서 단체복 대여 주문이 물밀 듯이 몰려 왔어요. 똑같은 옷을 열 벌 스무 벌 만들었어요. 나중에는 사이즈가 스무 가지로 다양해지더군요.”

 

1999년도에 체인점을 오픈하기 시작했다. 체인점 한 개가 열릴 때마다 2000만 원어치의 초도물량이 나갔다. 체인점은 입소문을 타고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2000년도에 지금의 건물을 사서 리모델링했다. 보증금 1000만 원, 월세 30만 원에 매장 계약할 때 3층짜리 건물 사서 1층에 매장, 2층에 학원, 3층에 살림집하는 게 꿈이었는데 5년 만에 그 꿈을 이룬 것이다. 꿈을 이룬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것도 동시에 건물 두 개의 건물주가 됐다. 경매로 나온 건물을 사려고 했다가 떨어진 줄 알고 옆 건물을 샀는데, 경매 물건도 낙찰된 상태였던 것이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 이것도 운명이라고 생각했어요. 빚을 냈어요. 지금은 두 건물 사이에 다리를 놓아 연결시켜서 효율적으로 잘 사용하고 있어요. 1층은 매장, 2층은 한복 대여점, 3층은 학원 겸 작업실로 사용합니다. 대여 사업은 활황이었어요. 칠순 잔치, 팔순 잔치가 많았잖아요. 가장 많을 때는 체인점이 60개까지 늘었어요. 옷이 예쁘다고 소문이 나서 하와이를 시작으로 중국, 사우디아라비아 등 해외에서 한복 패션쇼도 열세 번이나 열었어요.”

 

사업이 잘 되고 남편도 임원으로 승진했다. 사회에 되돌려 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 무렵 지인이 로타리를 소개해 줬고, 2003년 수원장안로타리클럽이 만들어질 때 창립 멤버가 됐다. 1대 회장을 역임했으며, 창립 멤버 중 유일하게 남은 존재가 됐다. 클럽이 어려울 때 꺼지지 않는 불씨 역할을 하며 중견클럽으로 성장시켰다.

 

지역 대표, 회원증강유지위원장, -대만 자매지구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로타리안으로서의 내공을 키워갔다. 회원증강유지위원장이던 2018년도에는 한국 최초 세계 최초로 미혼청년클럽인 경기라온클럽을 창립시키기도 했다. 지난 712021-22년도 3750지구 총재에 취임했다.

 

 

▲ 총재 취임식 날 생일을 맞은 박미연 총재 부부가 등에 앙증맞은 내용이 담긴 리본을 단 쌍둥이 손녀로부터 축하 인사를 받고 있다.

 

▲ 가인 박미연 총재 부부가 3750지구 역대 총재들과 임원들의 축하와 소망이 적힌 풍선을 하늘로 날리고 있다.


 

도전하지 않으면 성공의 기회조차 없다고 강조하는 가인 박미연 총재의 애칭은 ‘IT 총재. 코로나 바이러스 상황에도 화상회의, 유튜브 등 IT(정보기술)를 최대한 활용하며 지구를 열정적으로 이끌고 있다. 로타리안들 간에 직업교류를 할 수 있는 가인프로그램도 개발했다.

 

가인 총재의 지구 표어는 위기를 기회로! Yes, we can!’이다. 가인 총재는 취임식에서 봉사로 삶의 변화를’(Serve to Change Lives) 테마를 내건 쉐이커 메타 RI 회장의 ‘Each One Bring One’(한 사람이 한 사람 영입하기를 의미) 요청에 발맞춰 3750지구 회원 5000명 시대를 열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현재 회원수는 3600명 수준이다.

 

아버지께서 늘 말씀하셨어요. 자식들에게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 줘야 한다고. 나이 들어보니 그 방법을 알겠더군요. 총재 취임 날이 저의 생일이었어요. 90세이신 어머니가 보시고 얼마나 기뻐하셨는지 몰라요. 총재 기간이 끝나면 파리에서 의류를 전공한 딸과 함께 할 수 있는 멋진 사업도 구상해 놓았어요. 총재 기간 1년 만큼은 나중에 후회하지 않도록 봉사에 미쳐서 살 겁니다. 리더는 책임감이죠. 호호.”

 

긍정의 화신’, ‘배려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가진 박미연 총재. 순한 얼굴과는 달리 내면은 강했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때 보람을 느낀다는 박 총재는 다문화가정 자녀에게 한복을 입혀서 예절교실을 진행한 후 입힌 한복을 선물로 주는가하면 다문화가정에 한복 500벌 기증, 1000벌 이상의 무료대여 등 선행을 베풀고 있다. 그 공로로 행정안전부 장관상을 받기도 했다. 부드러운 카리스마 소유자인 가인 총재는 자신의 아호 가인처럼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김중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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