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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신문의 전문가 칼럼 화성춘추 (華城春秋)258]
사랑받는 부모, 공경받는 부모! 어느 부모가 되고 싶은가?
 
화성신문 기사입력 :  2024/11/11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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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수연 장안대학교 유아교육과 교수/ 교육학 박사     ©화성신문

“요즘 어른이라고 으스대는 부모가 어디 있겠어? 난 자식과 친구처럼 허물없이 지내고 있지”라는 말을 주변에서 간간이 듣는다. 부모라고 권위를 내세우면 안 된다는 것에 공감하며, 그것이 진정 자녀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나, 오늘날 무너지는 부모의 권위를 볼 때, ‘부모가 자녀와 친구처럼 지낸다는 것이 과연 옳은 생각일까?’하는 의문이 든다. 조선시대 율곡 이이가 저술한 ‘격몽요결(擊蒙要訣)’에서 부모와 자식 간에는 사랑보다 공경이 더 중요하다고 언급한 것을 보고 부모와 자녀 간에 사랑이 중요한가? 아니면 공경이 중요한가? 하는 의문이 깊게 들었다.

 

‘자녀는 사랑으로 키워야 한다’는 말은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불문율이다. 그런데 율곡은 왜 사랑보다 공경을 더 내세웠을까?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 사랑의 의미부터 살펴보자. 프롬(Fromm)은 사랑은 상대방의 잠재능력을 길러 주는 것이며, 참된 사랑에는 관심(care), 책임(responsibility), 지식(knowledge), 존중(respect)이라는 4요소를 갖추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중 존중이 공경과 유사한 용어라고 본다면 사랑하면 공경한다는 말도 되므로 사랑받는 부모, 공경받는 부모 둘 중 택일이란 용어는 논리상 맞지 않다. 그럼에도 왜 부모는 자녀를 사랑으로 키우는데 아이에게 공경을 제대로 받지 못할까? 이에 두 가지 의문이 든다. 하나는 ‘존중과 공경이 같은 의미인가?’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자녀도 부모가 자녀에게 행하는 사랑을 그대로 부모에게 하고 있는가?’하는 것이다. 

 

먼저 프롬이 말하는 존중의 의미는 ‘있는 그대로 보고 그 자체를 인정하는 것’이다. 이에 비해 공경은 ‘공손히 받들어 모시는 것’이다. 존중에는 경외의 마음이 없을 수 있으나, 공경에는 경외의 마음이 부분적으로 반드시 내포되어 있다. 스턴버그(Sternberg)는 존중을 친밀감이라고 표현하였다. 이는 같은 생각을 가진다는 의미이다. 스턴버그는 두 사람 간에 친밀감으로만 가득 차면 좋아하는 것(like)이지, 참된 사랑(love)이 아니라고 했다.

 

자녀가 부모에게 행하는 사랑은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모습과 다르다. 부모는 자녀의 잠재능력을 개발하기 위해 사랑의 4요소를 모두 충족하는 참된 사랑(love)을 하지만, 자녀는 미성숙하기에 부모의 잠재능력을 개발시켜 주는 참된 사랑은 어렵다. 자녀는 사랑을 받는 입장이지 사랑하는 입장은 아니다. 단지 자녀는 부모를 존중하는 ‘좋아하는 사랑(like)’을 한다. 혹여 부모가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지 않으면 쉽게 ‘싫어(dislike)’로 바뀐다. 이에 비해 공경은 부모의 은혜에 대한 고마움이나 역량에 대한 존경에서 우러나온다. 그러므로 공경은 존중처럼 쉽게 변화되지 않는다. 또 공경은 좋아하는 것보다 권위가 내포되어 있어 부모의 말씀을 존중하고 따르게 만든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와 그의 스승 플라톤의 일화를 보자.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을 따르고 플라톤으로부터 아카데미아의 정신, 책벌레라는 등의 칭찬을 받았다. 두 사람은 상호 존중하는 사이였다. 그러다 점차 아리스토텔레스가 ‘지혜는 플라톤과 함께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면서 상반되는 관점을 취하자 플라톤은 분노하여, ‘어미젖을 다 빨아먹고 발로 차는 망아지’라고 아리스토텔레스를 폄하했다. 이른바 상호 존중이 깨어졌다. 그러면서도 아리스토텔레스는 ‘나는 진리를 더 사랑하지만 여전히 플라톤을 사랑한다’는 말로 플라톤을 공경하고 있음을 표현했다. 

 

부모-자녀 관계도 이와 유사하다. 어린 자녀에게 부모는 단지 은혜를 베푸는 자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신과 같은 절대적 존재이다. 그러다 자녀가 점차 지식과 생각이 깊어지고 주관이 강해지면서 부모와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 이때는 ‘좋아’보다 ‘싫어’하는 단어를 더 많이 사용할 수 있다. 그래도 부모의 은혜가 깊고, 역량이 있으면 공경의 마음은 사라지지 않는다. 부모는 나의 생각과 다르지만 대단한 분이라는 것을 인식한다.

 

사랑을 강조하는 기독교의 십계명에서 ‘네 부모를 공경하라’라고 말한다. 자녀는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 그러나 공경하라고 말한다고 해서 공경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자녀가 부모를 공경하도록 부모가 먼저 덕과 역량을 갖추어야 한다. 맹자는 인(仁)이 불인(不仁)을 이길 수 있는 것은 물이 불을 이길 수 있는 것과 같다. 그러나 지금 仁을 행하는 사람은 조그마한 덕으로 큰 효과를 기대하고 있으니 마치 한 잔의 물로 한 수레의 나무에 붙은 불을 끄려는 것과 같다고 했다. 부모는 적은 덕과 역량으로 자녀에게 발생할 수 있는 싫어하는 마음을 진화하여 큰 공경을 받으려 하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새겨보아야 한다.

 

syhaa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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