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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 소공인을 찾아서] 김기성 고려오토서비스 대표
15세 ‘꼬마’, 파란만장 끝에 ‘백년 소공인’ 되다
공장 견습공·주유소 권총맨·버스 정비사… 50년 고군분투 ‘결실’
“삼보컴퓨터 의전 담당 땐 2~3명이 하던 일, 혼자서 척척 해냈죠”
미국 GM앨리슨과 11년 인연 후, 독일 ZF와 14년째 달달한 인연
“일찍 피고 지는 것 보다 늦게 피고 늦게 열매 맺는 게 더 의미”
 
김중근 기자 기사입력 :  2020/07/20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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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기성 고려오토서비스 대표가 ‘백년 소공인’에 선정된 소감을 말하며 환하게 웃고 있다.     © 화성신문

 

 

이름 대신 꼬마로 불렸다. 나이도 어리고 체구도 작았기 때문이다. 이듬해 1월 중학교 졸업을 앞둔 196812월부터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열다섯 살 나이, 자동차 라이닝을 제조하는 공장 견습공이 그의 생애 첫 이력이다. 고려오토서비스 김기성 대표의 곡절 많은 삶은 그렇게 시작됐다.

 

강원도 원주 출생의 1954년생인 김 대표는 화성시 양감면에서 독일 ZF사에서 생산하는 트랜스미션을 수리하는 대리점을 운영하고 있다. 올해 2월 중소벤처기업부로부터 백년 소공인으로 선정됐다. 물결이 만 길 높이로 인다는 뜻의 파란만장만큼 김 대표의 인생을 압축적으로 설명해 줄 수 있는 말은 없을 듯하다. 공장 견습공 생활 3개월 동안 석면 가루를 손으로 만지는 일을 했다.

 

지금은 있을 수 없는 일이죠. 하루 일당 100원 받았어요. 버스비가 3, 4원 할 때니까 100원이면 큰 돈이죠. 하하.”

 

이후 병 만드는 공장에서 꼬마로 불리며 3개월, 주유소에서 기름 넣는 권총맨’ 10개월, 주유소에서 200미터 떨어진 버스 정박장 정비사 보조로 3개월의 시간을 보냈다. 정비 기술을 배우고 싶어 세끼 밥 먹여주는 조건으로 시작한 것이 정비사 보조였다.

 

주유소 어르신(사장)이 야간고등하교 보내준다고 했는데 기술 배우겠다고 했어요. 중학교 1학년 때 수학을 빵점 맞은 게 영향을 미쳤나 봅니다. 다른 과목은 평균은 했는데.”

 

그러다 서울 중랑구에 있던 안성여객이라는 버스회사에 정비사 보조로 들어갔다. 숙식을 해결하며 기술을 배웠다. 버스 다섯 대를 맡았다.

 

 

▲ 김 대표와 임직원들이 손을 맞잡고 파이팅하고 있다. 김 대표 왼쪽은 하상길 팀장, 김 대표 오른쪽은 장만선 공장장.     © 화성신문

 

 

김 과장 밖에 나가서 한 번 해봐

 

옛날에는 버스 한 대 가지고, 아버지는 운전하고 딸은 안내양, 아들은 정비를 하던 시절이었어요. 기업화는 1970년대 중반에 이뤄졌어요. 정비사 일당이 1,000원이었는데 굉장히 많은 돈이었죠. 저는 꼬마니까 어디 소속도 아니었어요. 오야지한테 소속돼서 오야지가 주는 대로 받아요. 밥 세끼 얻어먹고. 그렇게 기술 배우기 시작했어요. 오야지가 기술은 좋은데 약주 드시면 23일이야. 엔진 오일 갈고, 미션 오일, 라디에이터 물 부어주는 거, 그게 제 일이예요. 20대 중반의 중간 기술자 형님이 트랜스미션 내리고 올리는 거, 바퀴 뜯었을 때 라이닝에 홀 실린더 장착시키는 거, 삼발이 디스크 조정하는 거를 가르쳐 주었어요. 그 형님도 술을 많이 마셨어요. 관리자에게 밉보여서 잘렸어요. 제 인생길도 바뀌었죠.”

 

지인을 통해서 남양주 덕소에 있는 버스회사에 정식 정비사로 들어갔다. 1972, 스무 살의 나이였다. 버스 한 대를 맡아서 정비했다. 1974년 군에 입대해서 운전병으로 복무했다. 1977년 제대 후에는 79년 말까지 택시 운전을 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 후 계엄령이 선포되는 등 사회가 어수선한 시절이었다. 1982년 말까지 덤프트럭을 몰았다.

 

“198212, 주식회사 한진에 자가용 기사로 들어갔어요. 회사 중역을 모셨죠. 19861017일까지. 1984년 서른한 살에 영어 공부를 시작했어요. 잘하는 영어는 아니지만 일상 생활에서 사용하는 데는 지장 없어요.”

 

19861018, 사우디아라비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한진 지점에서 크레인 기사로 근무했다. 컨테이너를 하역하고 싣는 크레인을 조종했다. 쉬는 날이면 물병 하나 들고 사막 체험을 할 정도로 호기심도 많았다. 영어 실력도 꽤 늘었다.

 

돌아가신 아버지 때문에 19902월 귀국했다. 전년도 10월에 돌아가셨는데 100일 탈상에 맞춰서 귀국한 것이었다. 탈상을 마치고 사우디로 돌아가려는데 어머니가 못 가게 극구 말렸다. 다시 출국하면 못 볼 지도 모른다는 게 어머니의 생각이었다. 회사에서는 사우디로 갈 것을 종용했지만, 어머니와 가족 때문에 발목이 잡힌 것이다.

 

알고 지내던 삼보컴퓨터 총무대리한테서 전화가 왔어요. 제가 귀국한 줄 아니까 전화를 한 거예요. 19903, 삼보컴퓨터 의전 담당이 됐습니다. 당시 삼보는 거래소에 상장해서 돈을 주체 못 할 시절이었어요. 23개월 근무했어요. 해외에서 엔지니어들, 바이어들 오는데 전담할 사람이 없는 거예요. 제가 입사하기 전에는 운전기사와 팀장, 팀장이 영어 못하면 영어하는 사람까지 2~3명이 나갔어요. 제가 입사하고 나서는 어떤 바이어가 오더라도 혼자서 감당할 수 있게 된 거죠. 택시 운전 했으니까 서울 지리도 잘 알고, 서울 관광도 시켜주곤 했지요. 회사에서는 굉장히 좋아했어요. 혼자서 척척 해내니까요. 그렇지만 조직 생활에 한계가 있었어요. 학력이 중졸이잖아요.”

 

회사를 나와야겠다고 생각할 무렵, 군포 산본신도시 아파트 분양에 담첨됐다. 19925월에 입주했다. 신도시라 유통이 잘 안 되니까 포터 한 대 사서 야채 장사를 할 요량이었다. 그 당시 미국 GM앨리슨 트랜스미션이 시내버스에 장착되고 있었다. 삼미그룹에서 전국 대리점 권한을 받았고, 지역 대리점을 해야 할 사람을 찾다가 김 대표에게 연락이 왔다.

 

“199254, 유나산업이라는 회사에서 GM앨리슨 트랜스미션 AS맨으로 시작했어요. 영어가 좀 되니까 매뉴얼을 독해할 수 있었죠. 지사장도 미국 사람, 서비스 제너럴 매니저도 미국 사람, 현장 맨은 저 하나였죠. GM앨리슨 수도권 딜러였죠. 열심히 일 하니까 사장님이 저를 인정하시더군요. 어느 날 사장님이 부르시더니 김 과장 밖에 나가서 한 번 해봐하시더군요. 서울 한강 이남과 경기도, 인천, 대전까지 AS지역을 떼어주셨어요. 퇴직금 조로 차량하고 기계도 주셨어요.”

 

 

▲ 김기성 대표가 ZF제품인 6단 자동변속기를 분해하고 있다.     © 화성신문

 

 

독일 ZF 스카우트 배경엔 성실과 신뢰

 

1996527. 고려오토서비스는 그렇게 탄생했다. 자본금 700만 원에 월세 30만 원. ‘꼬마대표가 된 것이다. 의왕시에서 사업자 등록을 했다. 1인 기업이었다. 의왕시에서 2년여를 운영하다 IMF가 한창이던 98년 시흥시로 옮겼고, 직원 한 명을 채용했다.

 

화성으로 이전한 것은 2000415일이었다. 수원대학교 인근 와우리에 카센터 겸 변속기 조립 공장을 지었다. 자동차3급 부분 정비업 허가를 받았다. 허가번호는 2000-08. 4년 전인 2016년도에 현 위치인 양감면 사창리로 이전했다.

 

고려오토서비스는 199671일자로 미국 GM앨리슨과 서비스 딜러 파트너 계약을 체결했다. 20075월 말까지 11년간 인연을 맺어오다 200761일자로 독일 ZF 서비스코리아와 계약을 체결해 현재까지 사업을 영위하고 있다.

 

신용이 중요합니다. 지난 30년간 출장비를 받아본 적이 없어요. 단 한 번도. AS기간 내에는 미국 회사와 일할 때는 미국에서 돈을 줬고, 독일 회사일 때는 독일에서 줬어요. AS기간 이후에는 누가 돈을 줘야 하잖아요. 하지만 출장비 없이 성실하게 서비스했습니다. 새벽에 나간 적도 헤아릴 수 없어요. 그 과정에서 고객과의 신뢰가 형성됐어요. 독일 ZF에 스카우트 된 배경에도 신뢰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어요.”

 

고려오토서비스에는 한국에서 최고의 오토서비스 회사가 되자는 뜻이 담겨 있다. 고려오토서비스의 2019년 매출액은 8억 원. 직원은 김 대표 포함 5명이다.

 

독일 ZF105년 된 회사예요. 기술력이 탁월하죠. 고속도로를 달리는 고속버스에는 현대 기아 대우 할 것 없이 모두 ZF 제품이 들어가 있어요. 수동 변속기죠. 국내에서도 만드는 데 300마력 이상 넘어가는 것은 내구성을 맞춰주질 못해요. 관광버스하고 2층 버스에도 ZF 트랜스미션이 들어가 있습니다. 3년 전부터는 고속버스에 오토가 들어가요. 2000대 정도 깔려 있습니다.”

 

현재 대한민국에는 인천 부평에 독일에서 100% 투자한 현지법인 ZF서비스코리아가 있고, 공식 대리점이 6곳 있다. 그 중 하나가 수도권에 위치한 고려오토서비스다. 나머지 대리점은 대구, 전남, 전북, 경남, 강원도에 각각 하나씩 있다.

 

전국 대리점 중에서 수동과 오토 미션 AS서비스를 하고 있는 공식 대리점은 저희 하나 밖에 없어요. 나머지 다섯 곳은 다 수동만 합니다. 화성에 와서 승용차 오토미션을 같이 하게 됐어요. IMF 당시 엄청 힘들었어요. 먹고 살아야 하니까. 직원을 광주에 있는 후배한테 두 달 트레이닝 보냈어요. 그 후배가 승용차 오토미션 분야에서 알아줬거든요. 저도 금요일 저녁이면 야간열차 타고 내려가서 기술 배웠어요. 20년 전이니까 47세 때네요. 그렇게 기술 익혀서 승용차도 하고, 대형차도 하고, 크레인 미션도 하고 있습니다.”

 

김기성 대표는 급변하는 미래에 대한 대비책도 마련해 나가고 있다.

 

트랜스미션 하나로 25년을 했는데 전기버스가 돌아다니는 시대가 됐어요. 우리 회사 다니던 아들을 폴리텍대학에 보냈어요. 기계공학과를 나왔는데 앞으로 전기차와 수소차를 하려면 배워야 하잖아요. ZF모터가 장착돼서 나오기 시작했어요. 그걸 저희가 서비스를 해야 하니까요. 변화에 발 빠르게 대응해야죠. 지금은 버스하고 일반 트럭만 취급하는데 앞으로는 덤프 차량 레미콘 같은 중장비 건설 기계도 다룰 겁니다.”

 

김 대표는 올해 한국 나이로 67세다. 당초 은퇴할 생각이었으나 올해 1월 복귀를 선언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백년 소공인에 선정됐기 때문이다.

 

은퇴해서 농사를 지을 생각이었어요. 2년간을 곁에서 봐주기만 했었습니다. 업무회의도 안 들어갔죠. 뜻밖에 백년 소공인에 선정되고 보니 해야 할 일이 많아진 것 같습니다. 하하.”

 

김 대표는 2005년 자동차 전문 정비조합인 카포스화성시 지회장에 취임하면서 장애인 차량 무상 점검 서비스를 시작했다. 흉내만 낸 것이 아니라 배터리를 교체해 줄 정도로 제대로 했다. 화성시에서 인정을 받게 됐고, 예산 지원을 받아 장애인 뿐 아니라 자원봉사자, 국가유공자까지 대상을 늘려갔다.

 

김 대표는 스스로를 부지런한 사람, 정직한 사람이라고 칭했다. 군대 휴가 나와서도 돈을 벌기 위해 택시를 몰았다. 살아오면서 어려울 때마다 좋은 분들을 만나 적지 않은 도움을 받았기에, 보은 차원에서 봉사 활동에도 열심이다. 화성시효마라톤대회 봉사를 비롯 전곡항 세계요트대회와 경기도 아시아태평양 장애인예술제, 여수엑스포에서 영어 안내 봉사를 했다. 평창올림픽 때는 40일간 선수촌에서 등록증 발급해주는 부서에서 영어 안내 봉사를 했다.

 

인생길에서 좋은 사람들 만난 나는 행운아

 

그때 1년에 1억씩 까먹었어요. 40일이나 회사 비우고 봉사하니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지요. 다른 사람들은 저보고 미쳤다고 그래요. 그래도 지나고 보니 참 잘했다 싶어요. 장애인들이 사력을 다해 결승점을 통과한 후에 탈진하는 모습을 보고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 김기성, 너 인생 저렇게 살아봤냐?’ 봉사 활동에서 얻는 인생의 가치가 저에게는 살아갈 힘이 됩니다.”

 

지금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하자는 좌우명을 가진 김 대표는 현재 기배동적십자봉사단에서 활동하고 있다. 화성시자원봉사센터 상담봉사단 단장도 맡고 있다. 배움에 목말라서일까. 지난해에는 소공인특화경영대학을 졸업했고, 화성시농업기술센터에서 운영하는 화성시그린농업기술대학도 나왔다. 불교대학에서도 공부했다. 불교대학 다닐 때 미얀마로 42일 단기 출가를 하기도 했다. 2019년도에 화성시티투어 안내자 시험 봐서 합격했고, 지난 5월 위촉장을 수령했다.

 

제가 좋아하는 단어가 세 개 있어요. See, Think, Act. 보고 생각하고 행동하라는 뜻이죠. ZF 독일 본사 표어이기도 합니다. 직원들하고 소통하려고 노력합니다. 내가 이렇게 하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해? 이렇게 묻죠. 인생을 꽃에 비유하면, 일찍 개화해서 일찍 열매를 맺는 나무도 있고, 늦게 개화해서 늦게 열매를 맺는 나무도 있어요. 저는 늦게 피고 늦게 열매 맺는 것이 더 의미 있는 것 같아요. 저처럼요. 내 정년을 내가 정할 수 있으니까요. 하하.”

 

백년 소공인으로 선정된 김 대표에게 같은 소공인들에게 조언을 부탁했다.

 

자긍심, 자부심을 가지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대한민국에서 엔지니어로 시작해서 사업자 등록을 자기 이름으로 내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소공인들은 성공자의 길에 들어선 분들입니다. 마음의 문을 열고 더 넓은 세상을 보시기 바랍니다. 주변도 좀 둘러보시고요.”

 

김 대표의 호는 추담이다. 가을 추() 못 담(). ‘가을의 호수처럼 깊어지라는 뜻을 담고 있다고 했다. 인터뷰 말미에 김 대표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들려달라고 했다.

 

저는 행운아예요. 굽이굽이 참 좋으신 분들을 많이 만났어요. 좋은 친구들도 많이 만났고요. 강한 게 이기는 것이 아니고 지는 게 이기는 겁니다. 1982112일 결혼했어요. 아내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가계부를 계속 쓰고 있어요. 어려울 때 묵묵히 도와준 참 고마운 사람입니다.”

 

김중근 기자 news@ihs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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