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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수수께끼 그림 김홍도 풍속화 - ④ 씨름
정조와 김홍도 시대 정말 태평성대였나?
 
주찬범 향토작가 기사입력 :  2019/05/07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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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보물 제527호 <<단원풍속도첩>>(일명 김홍도 필 풍속도 화첩)에 수록된 풍속화 25점은 국민그림으로 널리 사랑받는다. 하지만 명성에 걸맞지 않게 김홍도가 직접 그린 작품인지에 대한 논란이 제기되어 지금껏 정리되지 않은 상태이다. 실제 전문적인 안목이 없더라도 찬찬히 관찰하면 의문점을 도처에서 발견할 수 있다. 매주 화성신문 지면을 통해 독자들과 함께 상식의 눈으로 <<단원풍속도첩>> 풍속화에 숨어있는 수수께끼를 풀며 정조와 김홍도가 살았던 시대를 여행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 <씨름> <<단원풍속도첩>>,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화성신문

 

▲ 그림 1. <<<단원풍속도첩>> 중 <씨름> 부분 확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화성신문

 

▲ 그림 2. <<<단원풍속도첩>> 중 <씨름> 부분 확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화성신문

 

▲ 그림 3. <<<단원풍속도첩>> 중 <씨름> 부분 확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화성신문

 

▲ 그림 4. <<<단원풍속도첩>> 중 <씨름> 부분 확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화성신문

 

▲ 사진2     © 화성신문

 

▲트릭. 계획된 신체묘사의 오류 및 비일상적인 상황 설정

 

①오른쪽 하단 땅을 짚고 구경하는 사내의 오른손을 왼손처럼 그렸다.(그림 1) 

 

②씨름하는 사내들이 벗어놓은 2켤레의 신발 코 방향이 자신들이 앉아있던 자리를 향해 있다. 자리로 돌아올 때를 대비해서 정리하고 나갔을 수 도 있지만, 그러기에는 대충 벗어 놓은 모양새다. 왼쪽 상단, 갓과 신발 벗어놓고 대기하는 인물의 신발 코 방향과 비교된다.(그림 2) 

 

③왼쪽 상단 신발을 벗어놓고 대기하고 있는 인물이 벗어 놓은 갓에는 몇 개가 포개져 있다.(그림 2) 

 

④버선을 신은 채로 씨름을 한다.(여타 풍속화에도 버선을 신고 씨름하는 도상은 있다)

 

⑤오른쪽 상단 팔을 괴고 누워서 구경하는 사내, 상투를 틀었음에도 망건은 쓰지 않았다.(그림 3)

 

⑥엿 파는 소년은 엿목판을 ‘X’로 메고 있다. 항용 ‘I I’로 멘다.(사진1. 사진 2) 또한 엿목판에 동전 몇닢이 있다.(그림 4) 깨알 같은 디테일일 수도 있지만, ‘숨은 그림 찾기’처럼 관찰력을 시험하는 설정으로 판단된다.

 

 

▲잡설. 정조와 김홍도의 시대 태평성대였나?

 

정조연간은 조선회화사의 황금시대였다. 다양하고 전위적이며, 독창적인 장르의 그림이 화수분처럼 쏟아졌다. *김홍도의 <<금강사군첩>> 같은 실경산수화, *서양화법을 조선회화에 이식한 정물화 <책가도>, *<<단원풍속도첩>>을 비롯한 풍속화, *<평양기성도병>이나 <화성전도>같은 지도류, *<정조반차도>·<<화성능행도병>>·<태평성시도> 같은 국정홍보용 대작, *회화는 아니지만 <<원행을묘정리의궤>>에 수록된 도설(설계도) 등이 각 장르를 대표한다. 

 

흔히들 정조 시대는 농업생산성이 높아지고 상·공업이 육성됨에 따라 경제가 성장하여 자연부화하듯 회화가 꽃을 피웠다고 분석한다. 그러나 사실(史實)과 사실(事實)은 다르다. 정조 재임 후반기, 경제는 파탄났고 민생은 막장에 빠졌다. 백성의 고혈을 쥐어짜 ‘수원화성’을 쌓았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정조의 총신 정약용과 박제가까지 수탈에 신음하는 백성들의 참상을 기록으로 남겼다.

 

화성성역을 착공한 1794년(정조18), 암행어사로 연천 지방을 순찰하던 정약용(1762~1836)은 화성성역 비용을 조달하는 군정과 환정 때문에 도탄에 빠진 농민의 실상을 <적성촌에서>라는 시를 통해 고발했다. 

 

<적성촌에서> 정약용 정조 18년

 

시냇가 허물어진 집 뚝배기처럼 누웠는데 겨울 바람에 이엉 걷혀 서까래만 드러났다. 묵은 재에 눈 덮인 아궁이는 차갑고 체 눈처럼 뚫린 벽에 별 빛이 스며든다. 집안의 물건은 쓸쓸하기 짝이 없어 모두 팔아도 7, 8전이 안 되겠네 개꼬리 같은 조 이삭 세 줄기와 닭 창자같은 마른 고추 한 꿰미 깨진 항아리는 헝겊으로 발라 막고 무너 앉는 시렁대 새끼줄로 얽어매었네 놋수저는 이미 이정에게 빼앗기고 무쇠 솥은 이웃 부자가 빼앗아갔네 검푸르고 해진 무명이불 한 채 뿐인데 부부유별 따지는 것은 마땅치 않구나 어깨 팔뚝 드러난 적삼입은 어린 것들 한 번도 바지 버선 못 입었으리 다섯 살 큰 아이는 기병(騎兵)으로 올라 있고 세살 작은 애도 군적에 올라 있네 두 아이 군포로 500전을 바치고 나니 죽기나 바랄 뿐 옷이 무슨 소용이랴 강아지 세 마리 아이들과 함께 자는데 호랑이는 밤마다 울 밖에서 으르렁대네 남편은 산에서 나무하고 아내는 고용살이 가니 대낮에도 문이 닫혀 분위기 비탄하구나 아침 점심 다 굶다가 밤에 와서 밥을 짓고 여름에는 갖옷입고 겨울에는 베옷입네 들냉이 깊은 싹은 땅 녹기를 기다리고 이웃집 술 익어야 지게미라도 얻어먹겠네 지난봄에 꾸어 먹은 환곡이 닷 말인데 이 때문에 금년은 정말 못 살 겠네 나졸들 사립문 밖 닥칠까 겁날 뿐 현각(懸閣 현 청사) 에서 곤장 맞을 일은 걱정도 안 되네

 

오호라! 이런 집이 천지에 가득한데 구중궁궐 깊고 깊어 어찌다 살피랴 직지사는 한나라 때 벼슬 고을 수령을 마음대로 내쫒거나 죽였지 폐단의 근원 어지러워 바로 잡히지 않고 공수, 황패 나와도  뿌리 뽑기 어려우리 먼 옛날 정협의 유민도를 본받아 새로운 시 한 편 베껴 임금님께 돌아갈까

1798년(정조 22) 경기도 연평현령으로 나간 ‘박제가’가 정조에게 올린 장계 내용 또한 처참하다.

 

<박제가 장계> 정조 22년

 

“신이 이 산골 고을 백성들이 사는 모습을 볼 때마다 화전을 일구고 나무를 하느라 열 손가락 모두 못이 박혀 있었지만 옷은 십 년 묵은 해진 낡은 솜옷이고, 그 집은 허리를 구부려야 들어갈 수 있는 움막이었습니다. 연기가 가득하고 벽은 바르지도 않았는데, 그 먹는 것은 깨진 주발에 담긴 밥과 간도 하지 않은 채소뿐입니다.

 

부엌에도 나무젓가락만 있었고 아궁이 위에는 항아리로 만든 솥이 있었습니다. 그 이유를 물어보자, 무쇠 솥과 놋수저는 이정이 몇차례 꿔다 먹은 곡식값으로 이미 빼앗아갔다는 것입니다. 부역에 대해 묻자 노비가 아니면 군보의 신분이라 250~260전을 관에 납부한다고 했습니다. 국가의 경비가 나오는 곳이 바로 여기입니다. 측은한 마음에 베를 짤 마음도 나지 않는 홀어미처럼 탄식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지금 법을 바꾸지 않으면 지금의 풍속 아래서는 하루아침도 살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별히 이 현 하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고을이 다 그렇고, 나라가 모두 그렇습니다.” 

 

정약용과 박제가 그리고 우리들까지 당시 수탈의 주체를 지방 목민관과 이정을 지목해서 매도하지만 터무니없다. 원흉은 ‘화성성역’이었고, 그 뒤에는 장용영이, 정점에는 정조가 있었다. 정조와 정조의 금고지기 장용영은 확보된 예산 한 푼 없이 1년 국가총예산의 50% 가까이 소요되는 화성성역사업을 감행했기 때문이다.

 

비용은 앞으로 수금할 군정과 환곡이자로 메꾸겠다는 계획이었다. 정조는 무리하게 화폐(동전)를 발행했고, 장용영은 화성성역비용을 부담해야하는 지방관아에게 이자를 받고 빌려주었다. 장용영에 빌린 돈을 상환해야 하는 지방관아는 피도 눈물도 없이 백성들을 착취할 수밖에 없었다. 세종대왕과 함께 조선 최고 성군으로 추앙받는 정조대왕이 통치하던 시대의 민낯이다.  

 

<<단원풍속도첩>>에 수록된 풍속화 25점은 김홍도 진적 여부를 떠나 시대적 배경은 정조 시대이다. 그러나 등장인물들의 넉넉하고 낙관적인 표정에서 나타나는 태평성대의 은유는 허구이다. 어용(御用) 혹은 국정홍보라는 밑그림에 따라 그려진 그림이다. 그렇다면 정조 시대가 조선회화사의 황금시대를 구가할 수 있었던 것은, 경제성장이라는 자연부화가 아닌 정조의 정치적 목적이 개입된 인공부화였을 가능성이 높다. 단언컨대 정조와 김홍도 시대는 태평성대도 요순시절도 아니었다. 이처럼 수수께끼 그림 김홍도 풍속화에는 정조 시대 정치적 비밀까지 숨겨져 있다. 차차 하나씩 하나씩 풀도록 하겠다.

 

주찬범 향토작가 news@ihs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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