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상시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도 비상시에는 잘 보이는 법이다. 12.3 비상계엄 이후 한국 사회의 추악한 밑바닥이 보이기 시작했다. 윤석열의 비상계엄은 그 성립 요건과 목적, 형식과 절차를 비롯한 모든 관련 내용에서 누가 봐도 불법적이며 위헌적인 친위 쿠데타이자 내란 행위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민주주의에 반하는 명백한 책동에 명시적이거나 암묵적으로 동조하는 세력이 도처에 산재한다는 사실도 아울러 밝혀지고 있다. 극우집단의 가당치 않은 선동으로 내전을 방불하는 현 시국에서 대한민국의 사법 체계와 헌정질서의 근간이 위협받고 있다. 그 위기의 과정에서 군사독재와 식민주의의 잔재가 드러나고 있기도 하다.
비상계엄으로 야기된 사회적 혼란과 충격, 공포를 어찌해야 할까. 실로 다양하고, 다층적으로 분출되고 있는 사회의 모순을 여기서 모두 다룰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이번 사태로 인해 새삼 노출되고 있는 언론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짧게라도 짚어두고자 한다.
언론은 정치적으로 중립적이고 객관적이어야 한다는 명제가 일종의 상식으로 통용되곤 한다. ‘중립성’과 ‘객관성’은 언론의 공정성과 사회적 신뢰를 담보할 수 있는 보도 준칙이자 태도로 쉽게 받아들여지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한국언론사에서 ‘중립성’과 ‘객관성’이란 ‘정파성’에 대한 반의어 정도로 쓰이는 규제적 이념이지, 실증적이며 현실적인 준거를 통해 작동하는 가치형태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즉 이들 가치는 언론사에서 단순히 내세워지는 표어 이상의 구체적 역할을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반대로 우리는 최근 불거진 일련의 내란 상황에서 정치적 중립을 구실로 사회적 정의와 법치를 훼손하고 있는 언론의 현실을 목도하게 됐다. 비상계엄 보도에 있어서도 관철되고 있는 ‘기계적 중립’이라는 폭력이 그것이다.
‘기계적 중립(False Balance)’이란 주장이 갈리는 사안에 대해 진정으로 어떤 위치가 중립인지 성찰하지 않고 획일적으로 중간적 태도를 고집하는 ‘거짓 균형’을 의미한다. 여기서 주장이 갈린다는 것은 특정 사안에 대한 의견이 조율될 필요를 전제로 하는 상황 상태를 뜻한다.
그런데 과연 12.3 비상계엄에 대한 헌법적, 역사적 평가가 협의를 필요로 하는 사안인가? 법원에서 문제없이 발부된 체포영장을 불법이라 주장하는 일부 의견을 공론의 장에서 아무렇지 않게 전달해도 되는 것일까? 공소장에 ‘내란 우두머리’라고 적시된 윤석열을 지키겠다며 태극기를 들고 관저 앞에 나간 사람들과, 국회에서 통과된 탄핵소추안의 조속한 처리를 바라는 시민들의 의지를 마치 견해 차이라는 듯이 대등하게 소개해도 되는 것일까? 법과 인권, 자유와 평등 등, 민주주의 사회를 성립하고 있는 최소한의 조건을 파괴하려고 한 게 바로 비상계엄이었다. 이러한 전제 없이 가운데서 여러 의견을 청취한다는 명목으로 내란에 동조하는 견해를 내보내는 언론의 행태야말로 ‘기계적 중립’이 얼마나 폭력적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12.3 비상계엄 당시 선포된 계엄사령부 포고령 제1호 3항의 문구는 이러했다. “모든 언론과 출판은 계엄사의 통제를 받는다.” 포고령을 위반한 자에 대해서는 “영장 없이 체포, 구금, 압수수색을 할 수 있으며 계엄법 제14조(벌칙)에 의하여 처단한다”는 구절도 적시됐다. 내란에 동조하는 극우적 주장을 중립이란 변명으로 받아적고 있는 여러 언론들은 비상계엄이 성공했다면 통폐합되어 언론사로 존재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언론이 떠받드는 그 ‘중립성’조차 ‘언론의 자유’가 없다면 애초에 성립할 수도 없는 것이다. 언론 그 자신을 계엄군의 총칼로 처단하려고 했던 비상계엄에 대한 문제의식 없이 ‘기계적 중립’이라는 모호하고 한심한 스탠스를 취하며 내란 동조의 논리를 아무렇지 않게 유포하는 보도 행태에 대한 자성을 촉구하는 바이다. 민주주의와 내란(비상계엄)은 양립 가능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대등한 지위를 갖고 있지도 않다. 한국 근현대사의 가장 아픈 심연을 건드린 비상계엄조치에 대한 명백한 태도를 바탕으로, 언론이 민주주의의 가치를 지켜줄 최전선에 나서주길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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