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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호 교수의 Leadership Inside 318]
베를린 필의 두 지휘자, 카라얀과 아바도
 
화성신문 기사입력 :  2024/11/04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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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영호 아주대학교 명예 교수     ©화성신문

뉴욕타임스가 20세기 최고의 지휘자라고 평한 베를린 필의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은 항상 무대에서 눈을 지그시 감고 지휘를 했다. 악보를 완전히 머릿속에 넣고 음악에 심취해 있는 이 모습은 그를 진정한 마에스트로로 느끼게 했으며 대중을 클래식의 심해로 빠져들게 했다. 그가 지휘한 곡은 음반으로 제작되어 전 세계에 팔려나갔다. 그의 생전에 1억장 이상이 팔렸고, 그의 사후에도 1억장 이상 팔린 것으로 보고 있다. 클래식 음악계에서는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카라얀은 1955년 정식으로 베를린 필의 종신 상임지휘자가 되어 그가 타계한 1989년까지 무려 33년간 베를린 필을 이끌었다. 그는 이 기간 베를린 필을 음악적으로나 상업적으로 최정상에 올려 놓았다. 그런 만큼 그의 존재는 베를린 필에서 특별했고, 절대적이었다. 지휘자가 눈을 감고 지휘한다는 것은 그만큼 음악에 심취했다는 것을 말하기도 하지만, 연주자들과 눈을 맞추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연주자들과 소통을 하지 않고 거리를 둔다는 것을 뜻하기도 했다.

 

실제로 카라얀은 단원들을 학생 취급하다시피 했으며, 단원들의 의견을 듣거나 자율을 주는 대신 지시하고 지도하고 연습시켰다고 한다. 물론 단원들과 식사하는 것은 매우 예외적인 일이고 말이다. 카라얀의 리더십 하에서 베를린 필은 조화로운 선율 속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카라얀이 1989년 7월 16일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심근경색으로 사망하자 이야기는 달라졌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탈권위주의를 부르짖었으며, 그동안 너무 상업주의에 치우친 것에 대해서도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그리고 오케스트라 단원 간의 동료애도 회복하고 따뜻한 공동체가 되기를 원했다. 그러면서 상임지휘자의 종신제도 폐지를 요구했다. 그리하여 베를린 필 역사상 최초로 상임지휘자를 단원들이 직접 선출할 수 있게 해달라고 경영진에게 요구해 이를  얻어 냈다. 그렇게 하여 카라얀의 후임은 베를린 필 107년 역사상 처음으로 단원들이 직접 선출하는 절차를 밟았다. 단원들은 휴양지에 모여 교황식으로 후임자를 선출했다. 그렇게 해서 베를린 필의 제5대 상임지휘자로 선출된 사람이 클라우디오 아바도(Claudio Abbado)였다.

 

아바도의 등장은 여러 가지로 파격이었다. 선출 자체가 특별했을 뿐만 아니라, 그는 여태까지 지켜왔던 상임지휘자 계통을 이어온 독일계가 아니라 이탈리아 출신이었다. 게다가 그는 취임 일성부터 카라얀과는 정반대의 길을 걷겠다고 했다. 자신을 마에스트로라고 부르지 말고 이름인 클라우디오라고 불러 달라고 했다. 그는 카라얀처럼 단원 위에 군림하는 것을 거부했다. 단원 한 사람, 한 사람을 존중했으며, 그들에게 지시하기보다는 그들이 의견을 내고 그들이 스스로 결정해 주기를 원했다. 그는 단원들에게 동료 단원들의 연주를 듣고 거기에 맞춰 자신의 연주를 조절해 나가기를 원했다. 그리고 카라얀이 추구했던 상업주의에 제동을 걸었다. 학구적이고 실험적인 연주를 늘렸고, 젊고 참신한 연주자들을 영입했다. 

 

그런데 이러한 변화와 개혁이 생각만큼 환영받지 못했다. 처음에는 신선하다고 했지만, 단원들과 대중으로부터 불평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실험적인 연주에 대해서는 너무 어렵다거나 정제되지 않았다고 비판했고, 민주적인 리더십에 대해서는 리허설이 너무 길어지고 분위기가 혼란스럽다고 트집을 잡았다. 심지어는 카라얀이 그립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드디어 터질 것이 터지고 말았다. 1997년 12월 독일의 유력지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의 기자가 비공개로 진행되고 있는 베를린 필의 리허설 현장을 몰래 잠입 취재하여 ‘난장판’이라고 묘사한 기사를 실었다. 이로 인해 독일 사회가 발칵 뒤집혔으며, 아바도는 큰 충격을 받았다. 취재를 도왔으리라 생각되는 단원들에게도 실망이 컸다. 그는 결국 2002년 만료되는 기간을 끝으로 베를린 필을 떠나겠다고 선언했다. 이렇게 카라얀의 후임자는 카라얀의 그림자 속에서 불명예로 퇴진했다.

 

그러나 아바도는 결코 실패한 리더가 아니었다. 베를린 필은 이미 과거의 악단이 아니었다. 과거와 같은 제왕적 리더십을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는 문화가 만들어져 있었으며, 지휘자와 단원 간의 관계는 예전 같지 않았으며 출신 배경도 훨씬 다양해졌다. 아바도는 베를린 필을 떠난 후 2003년부터 그가 사망한 2014년 1월까지 스위스의 음악도시라 할 수 있는 루체른에서 여름 페스티벌 기간만 운영하는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다. 기라성같은 연주자들이 아바도와 함께하기 위해 세계에서 모여들었다. 루체른의 명성이 드높아졌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리더십은 이렇게 진화하고, 변모하고, 발전하는 것이다.

 

choyho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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