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가 처음 불을 사용하기 시작한 시기는 호모 에렉투스가 살았던 142만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인간은 오랫동안 기후와 계절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사용해 왔다.
고대 로마의 하이포코스트(hypocaust)라는 중앙 난방 시스템을 시작으로 냉방과 난방 기술을 발전시켜 왔으며, 이러한 기술은 오늘날 우리의 삶을 더욱 편리하고 쾌적하게 만들어주고 있다.
이렇게 우리의 산업 현장, 농업 현장에 친환경적인 냉난방 시스템을 공급해 주고 있는 강소기업 ㈜대현전열을 찾았다. ㈜대현전열은 10년 전 서울 독산동에서 팔탄면 온천로로 이전해 왔다.
산업용 공기조화기로 안정적 매출
㈜대현전열은 산업용 열풍기, 농업용 전기온풍기, 산업용 냉풍기 등을 개발, 제조, 공급하는 회사로 10년 이상된 베테랑 임직원 7명이 20억원 정도의 안정적인 매출을 올리고 있다.
산업용 열풍기는 발전소, POSCO, 현대제철 등의 기업들이 고객으로 국내 발전소의 70~80%를 점유하고, POSCO와 현대제철 구매시스템에 제품이 등록돼 있는 등 국내 시장의 절대 강자다.
㈜대현전열은 열풍기에 들어가는 히터를 직접 생산하기 때문에 고객의 다양한 요구에 대응이 가능하고, 고객의 긴급상황에 빨리 대응하기 위해 항시 1~2 Lot의 재고를 가져가고 있다. 3년 전 울산에서 지진으로 인한 물난리로 POSCO에서 물에 젖은 기계, 장비들을 건조시키기 위해 긴급 요청이 왔을 때도 이 재고를 이용한 즉각 대응으로 고객으로부터 많은 감사를 받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대현전열은 산업용 열풍기에서 안정적인 시장을 점유하고 있다.
농업용 전기온풍기는 화원, 하우스 딸기 농장 등이 주 고객이다. 기존에 많은 농가가 기름, 연탄, 가스 보일러를 사용하고 있는데, 환경 보호를 위해 지자체별로 보조금을 운영하면서 차츰 전기난방기로 전환하는 추세이다. 대부분의 지자체에서는 농기계 보조사업 전기난방기 교체에 50% 이상의 보조금을 지원하고 있다.
산업용 냉풍기는 저온성 식물 재배 하우스, 에어컨 설치가 어려운 제조 현장, 물류센터 등이 주고객이다. 이 산업용 냉방기는 심 대표의 오랜 고객이던 저온성 식물 재배 하우스 농민들의 지속적인 개발 요구로 만든 것이다. 기존의 냉방 시스템으로는 에너지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워서다. 귀에 딱정이가 앉을 정도로 개발 요구를 들었다는 심 대표는 전기세를 덜 들이고 냉방을 할 수 있는 시스템 개발에 몰두해 이 제품을 만들어 냈다. 물의 기화 시 기화열을 이용해 차가운 바람을 날려 보내는 방식으로 70~100평 규모를 커버하는 데, 시간당 전기세가 110원 정도로 한 달 내내 3만원 이내의 전기세만 내면 돼 농민들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었다.
기술은 소비자한테 배우는 것
심 대표는 소비자가 원하는 것은 현장에서 오랜 세월의 경험이 쌓여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이어야 기술로서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산업용 냉풍기를 개발할 때도 비닐하우스에서 일하는 아주머니들의 하소연을 귀담아듣고 개발에 반영했다. 아주머니들은 “비닐하우스를 시작하면 그때부터 감옥에 갇힌다”고 하소연했다. 난방을 위한 온도를 맞춰 줘야 하고, 하우스 문을 적절히 개폐해 주고, 적당한 시간에 식물에 물을 주어야 하기 때문에 도무지 비닐하우스를 떠날 수 없다는 것이다.
심 대표는 비닐하우스에서 일하시는 분들을 위해 위의 세 기능을 스마트폰으로 컨트롤할 수 있도록 개발했다. 드디어 비닐하우스에서 해방되어 마음 놓고 볼일을 볼 수 있게 됐다고 여간 기뻐하는 것이 아니었다. 심 대표로서는 나로 인해 누군가에게 큰 기쁨을 주었다는 사실에 가슴 뿌듯한 순간이었다. 현장에서 직접 일하는 분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였기에 이런 제품을 개발할 수 있었다.
고양기술센터의 장미하우스에는 열풍기 30대가 설치돼 있었다. 이 하우스에서 일하고 있는 아주머니들이 온도를 맞추기 위해 사다리를 옮겨 다니며 열풍기별로 on-off를 하고 있었다. 하루 종일 보통 힘든 일이 아니라는 푸념을 듣고, 열풍기에 통신이 가능토록 장치해서 아주머니들이 잠깐씩 쉬는 테이블에 30대를 한꺼번에 on-off 할 수 있는 Local Controller를 설치해 드렸다. 이후 현장을 방문하자 “너무 편해 죽겠다”며 현장에서 일하시는 분들이 음료수, 간식 등을 사서 선물로 안기는 일도 있었다. 심 대표는 이런 경험들을 통해 “기술은 소비자에게 배우는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임직원들에게도 이 점을 항상 강조한다.
‘아픔을 극복한 만큼 성장한다’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아픈 만큼 성장한다(What does not kill me makes me stronger)’라고 했다. 여기에 김선현 작가는 ‘아픔을 극복한 만큼 성장한다’로 수정했다. 어린 시절 아픔이 어떤 사람에게는 트라우마로 작용해 인생의 커다란 장애물이 되기도 하지만, 이를 극복한 사람에게는 더 강해지는 계기로 작용하기도 한다.
심 대표가 두 살 되던 해에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살게 됐다. 할아버지는 젊었을 때 고등학교 선생님이셨던 과묵한 분이셨는데, 심 대표가 “한글을 깨치기 전에 천자문 먼저 깨우쳤다”고 할 정도로 할아버지는 어릴 적부터 매일 한자를 가르치셨다.
고1 때 가계를 책임지셨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살림살이가 퍽퍽해졌다. 할머니와 함께 가까운 친척들을 찾아가 아쉬운 소리를 하면서 도움을 요청했지만 돌아오는 건 알량한 돈 몇 푼과 자괴감뿐이었다. 심 대표는 돌아오면서 “친척들에게 구차한 소리 하느니 내가 버는 게 빠르겠다”라고 결심했다.
영등포공고 디자인과를 다녔던 심 대표는 이때부터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하기 시작했다. 방학 때는 인쇄소를 다녔는데 어릴 적 한자를 공부했던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중고차 시장에서 명함 20곽을 곽당 3000원씩 주문받아 영등포 인쇄골목에서 1500원에 인쇄하면 3만원이 남는다, 연말에는 연하장을 주문받아 인쇄해 주는 것으로 수입이 짭짤했다.
친구들과 용돈으로 쓰기도 하고 집안 살림에 보태기도 했다. 이런 아르바이트 하느라 수업에는 얼굴 내미는 경우가 드물었지만 수학여행 경비가 없어서 못 간다고 하는 심 대표에게 본인 돈을 꾸어주면서 수학여행을 보내주신 선생님이 계셨고, 친구를 위해 심 대표가 부탁하는 것들을 척척 잘 들어주었던 좋은 친구들이 있어서 이 시절이 나쁘지 않았다. 어려운 형편에 도와줄 일가친척도 없었지만, 일찌감치 생활 전선에 뛰어들어 세상을 익힐 수 있었고, 어려움을 함께해 주는 든든한 친구들도 얻을 수 있어서 이 시절이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다.
히터의 세계에 발을 들여 놓다
고등학교 졸업 후 스무살 때부터 청계천에서 Heater를 만드는 곳에 취직했다. 볼거리도 많고 사람도 많아서 좋았다. Heater를 만드는 데 재미를 느꼈다. Heater를 만드는 지역마다 특성이 조금씩 다름을 알고, Heater 업체 순례를 하기 시작했다. 짧게는 3~4개월, 길게는 1~2년마다 회사를 옮기며 전국의 내로라하는 Heater 업체를 섭렵했다. 청계천에서 구로동으로, 구로동에서 안산으로, 안산에서 순천으로, 순천에서 인천으로 정처없이 떠돌았다. 워낙 떠돌아다니기를 좋아하고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다 보니 전혀 두렵지 않았다.
“그때야 뭐 나이도 어린데 어디든 가서 눈만 감으면 자는데요. 밥 주면 밥 먹고, 눈 감으면 자고 그렇게 하다 보니까 사실 세상에 대한 눈을 빨리 떴죠. 우연치 않았던 이런 계기가 저한테는 계속 운이 좋게 연결됐어요”라고 말한다.
24살에 Heater 사업을 시작하다.
이렇게 전국을 떠돌면서 Heater에 관한 기술을 섭렵한 심 대표는 98년 24살의 나이로 Heater 사업을 시작했다. 사업은 순조롭게 잘 됐으나 욕심을 부리고 믿었던 선배를 통해 어음 할인에 손을 댔다가 이 선배가 잠수를 타면서 큰 타격을 입고 결국 사업을 매각하게 됐다. 이후 무일푼이던 시절 아내 최현경 씨를 만났다. 심 대표는 아내를 “철 없는 나를 잔잔하게 잘 잡아준 사람”이라고 했다. 둘은 대림동에서 보증금 200만원, 월세 25만원인 반지하방에서 살림을 시작했다.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자신을 믿고 함께 밤잠을 아껴가며 노력하는 아내 덕분에 차츰 생활이 안정되어 갔다. 심 대표를 어릴 적부터 길러주신 할머니가 요양병원에 7년 동안 계시다가 돌아가셨는데, 아내 최현경 씨는 7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점심 시간마다 할머니를 찾아뵀다. 이 시절을 회상하는 심 대표의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그의 눈시울이 붉어짐을 느낄 수 있었다.
2005년 5월 아내의 도움을 받아 서울 독산동에서 500만원으로 다시 사업을 시작했다. 지인들에게 유휴 설비를 빌리고, 자재는 6개월 뒤에 갚기로 하는 등 그동안 쌓아온 인맥과 신용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당시 아내와 함께 밤잠도 제대로 못 자며 몇 개월간 일했는데 돈도 받지 못하고 사기를 당하는 어려움도 있었지만, 현장에서 직접 일하시는 분들의 고충을 귀담아듣고 이를 해결해 나가면서 충실한 그의 팬덤을 만들어 갔다. 이런 팬덤 덕분에 사업은 급격하지는 않지만 안정적으로 발전해 나갔다.
사람 만나는 게 제일 큰 즐거움
심 대표는 술을 그리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술자리를 좋아한다. 술자리에서는 으레 하나둘씩 서서히 빠져나가 마지막에는 소수의 주당들만 남기 마련이다. 심 대표는 주량이 아주 센 편은 아니지만 술자리에 가면 꼭 끝까지 남는다. 그러면 많은 사람이 있을 때 하지 못했던 사적인 대화가 오가고, 그러면서 더욱 친밀감도 느끼고 더 진한 친분도 쌓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골프를 치는 것보다는 골프 후 술자리를 더 좋아할 정도로 심 대표는 사람과 만나는 것에 진심이다.
심 대표가 화성에 자리잡은 지 10년이 지났다. 이곳에 오면서 절실하게 깨닫게 된 것이 직원을 구하려면 반드시 차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공장이 있는 곳도 배차 간격이 1시간이 넘어 자가용 없이는 출퇴근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중소기업의 구인난 해소를 위해서도 교통 인프라 개선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또한 인구 100만을 넘어 2025년도 특례시로 진입할 화성시가 환경개선에도 힘써야 할 시기라고 강조한다. 이런 관점에서 100만 화성시에서 농기계 보조사업 전기난방기 교체에 연간 5000만원으로 책정된 예산을 대폭 늘리고 농민보조사업 범위를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심 대표는 ㈜대현전열이 환경에 유해한 것은 절대 하지 않는다라는 친환경 기업 이미지와 공기조화기는 저 회사만 가면 다 해결된다는 이미지를 각인시키는 것이 1차 목표다. 이를 바탕으로 현재의 공장을 좀 더 확장한 후 직원들에게 제품별로 분배해 소사장제로 독립시키고, 심 대표는 제품 개발, 유통만 책임짐으로써 상생할 수 있는 체계를 구축한다는 비전을 가지고 있다. 그의 비전과 꿈이 실현되길 응원한다.
신호연 기자 news@ihs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