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도 길고 변덕스럽게 느껴지던 겨울도, 봄을 시샘하던 꽃샘추위도 완전히 물러가고 비로소 만화방창 꽃피는 시절이 돌아왔다. 간혹 황사나 미세먼지가 상춘(賞春)의 기쁨을 방해하기도 하지만 각종 꽃들이 앞다투어 피고, 질세라 연두색 이파리들이 상큼하게 얼굴을 내미는 참 좋은 계절이다. 청춘이 순식간에 가버렸다고 느껴지기에 세월이 갈수록 청춘을 느끼게 하는 봄이 더 반갑고, 고맙고, 아름답게 느껴진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계절에 우리의 고막을 건드리는 세상의 소리는 종종 소음의 수준을 넘어 심각한 불쾌감을 일으키기도 한다. 선거는 결코 조용한 행사가 아닌 까닭에 이래저래 시끄럽다. 선거철에 떠도는 말들 중에는 거칠고, 야비하고, 위선적이며, 내로남불, 자가당착에 가까운 말들이 섞여 있다. 강성 지지층에게는 지당한 말씀이지만 지지층이 아닌 사람들에게는 가당찮은 소음이자 공해일 뿐이다.
정치권뿐만이 아니라 이 시대 한국 사회 여러 세대의 언어 역시 갈수록 경박하고 거칠어지고 있는 것 같다. 십 대에서 중장년에 이르기까지. 예전의 십 대들은 기본적으로 어른들을 존중하고 어느 정도 무서워할 줄도 알았다. 그러나 요즘 십 대의 언행은 어떤가. 자칫 어른행세 잘못했다가는 거친 말의 반응에 뒷목을 잡을 수도 있다. 소위 MZ 세대로 통칭되는 이삼십 대 역시 지나칠 정도로 자기주장과 개성이 강한 탓에 종종 기존의 사회적 문법을 경시하는 세대로 비치기도 한다. 중장년 세대도 예외는 아니다. 역시 소란스럽고 자기중심적일 때가 많다. 가장 흔히 목격하게 되는 현장은 카페일 것이다. 서너 명이 같이 들어와 ‘썰의 즐거움’에 빠질 경우 그들의 방만한 목소리의 수다에 주변은 순식간에 초토화된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언명한 바 있다. 사물과 현상을 넘어 보다 근원적인 데 뿌리를 두고 있는 언어의 시원성(始原性)에 관심을 두었던 그는 릴케나 횔덜린, 트라클 같은 시인들의 시어에서 개별적인 존재자(das Seiende)를 넘어선 존재(das Sein)의 소리를 듣고자 했다. 거칠고 경박한 말의 공해가 가득한 사회에서 이래저래 부대끼며 사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일방적이거나 ‘툭 까놓고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말에는 말의 뉘앙스와 묘미, 시적 은유가 스며들기 어렵다. 순간의 소통에는 효율적일지 몰라도 지난 후에 잔잔한 여운이나 품격을 느끼게 해주지는 않는다.
한국 사회 여러 세대의 일상어가 갈수록 경박을 넘어 천박해지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기에 새삼 말의 품격과 사람의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가수 안치환의 노래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누가 뭐래도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이 모든 외로움 이겨낸 바로 그 사람/누가 뭐래도 그대는 꽃보다 아름다워/노래의 온기를 품고 사는/바로 그대 바로 당신/바로 우린 참사랑’
어느 때에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울까? 노랫말은 외로움을 이겨내고, 노래의 온기를 품고 살 때, 서로 참사랑을 나눌 때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고 말해 준다. 대중가요이지만 참 좋은 가사, 아름다운 노래이다.
우리는 꽃보다 아름다운가? 아니 아름다운 꽃이 될 수는 없을까?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에서 해법을 찾아보자.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그에게로 가서 나도/그의 꽃이 되고 싶다.’
꽃이 피고 지는 이 좋은 계절에 우리 모두 아름다운 말로 서로에게 꽃이 되고,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이 되자. 꽃들이 화들짝 놀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