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광고
광고
기획특집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그들이 있기에 화성시가 자랑스럽다”
화성지역의 근·현대 인물재조명
 
최대호 기자 기사입력 :  2008/07/14 [00:00]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화성시와 화성문화원이 지역의 근·현대 인물에 대한 역사적 의미를 재조명하는 시간을 마련했다. 화성지역 출신 독립 운동가들의 항일투쟁 자료를 수집하고 발굴해 그들의 역사적 의의를 되새기는 ‘화성지역의 근·현대 인물 재조명 공동학술회의’가 지난 9일 라비돌리조트에서 개최됐다. 이날 학술회의에서 재조명된 인물은 모두 4명. 향남 상두리 출신 학생독립운동가 김용창 선생, 매송면 야목리 출신으로 부민관 폭파의거의 주역이었던 조문기 선생, 용주사 승려였던 신상완 선생, 양감면 정문리 출신 청년운동가 박승극 선생 등이 그 주인공이다.

화성시화성문화원 2008년 공동학술회의 화성지역의 근·현대 인물재조명
사회: 한신대학교 국사학과 서굉일 교수

학생 승려 신분으로 독립운동 나서
옥고 등 수많은 고초에도 굳은정신


   
▲ 김용창 선생.
김용창 선생
발표자 : 수원대 사학과 박환 교수
토론자 : 경기도 문화관광해설사협회 이길원 회장

김용창 선생은 제암리 학살사건(1919년 4월)으로 널리 알려진 향남 상두리 출신의 학생 독립운동가로 재조명되고 있다.
그는 1926년 8월 3일 수원군 향남면 상두리 222번지에서 출생했다. 그는 향남면 향리에서 2년 동안 강습소에서 공부했으며 1933년 향남공립보통학교에 진학했다. 1941년 10월 그는 서울로 상경, 덕수공립상업학교 야간반에 진학했다. 그는 당시 경제적으로 어려워 학비등과 생활비를 마련키 위해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사환, 체신국 경성보험관리소 직원으로 근무했다.
1942년에는 경성 덕수상업고등학교 임종목 외 급우 8명과 함께 학우 동지공제회를 조직해 총독정치를 배격하고 반일 작문을 작성, 윤독했다는 이유로 용산경찰서에 체포돼 취조를 받기도 했다. 이후 그는 일본인과 조선일의 차별에 대한 강한 적대감을 표출하며 항일 운동을 지속했다.
이후 그는 민족정신 고취에 전력하다 경성고등검찰사찰형사에게 치안방해 혐의로 체포됐다. 결국 1944년 12월 14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및 일본천황 모독죄로 징역 1년6개월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1945년 4월 3일 대전형무소에서 해방을 눈앞에 두고 옥중 순국했다. 김용창 선생의 고향인 상두리에는 현재 그의 흉상이 세워져 있지만 실제 그의 항일운동은 화성시를 비롯한 학계에서도 별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발췌:수원대학교 박환 교수 발표문)

   
▲ 조문기 선생.
조문기 선생
발표자 : 민족문제연구소 박수 편찬실장
토론자 : 김준혁 수원시 학예연구사

1926년 화성시 매송면 야목리에서 태어난 조문기 선생은 1944년 소년의 몸으로 일본강관주식회사에서 3000여 명의 조선인 노동자가 참여한 ‘조선인 멸시 규탄 파업’을 주도했다.
1945년 1월 조국으로 돌아와 항일비밀결사 단체인 ‘대한애국청년당(약칭 애청)’을 조직하고 친일파 거두인 박춘금과 총독부 주요 인사들을 처단할 계획을 세웠다.
박춘금의 ‘대의당’ 집회 광고를 보고 7월 24일 친일거두가 총집결한 아세아민족분격대회장인 부민관 폭파 의거를 결행했다.
해방 후에도 선생은 ‘대한애국청년당’을 재결성하고, ‘인민청년군(대한청년군)’을 조직, 조국의 완전한 독립과 통일을 위한 투쟁을 계속했다. 1948년 6월 2일 이승만의 단독정부수립 기도에 저항하여 ‘인민청년군 사건’을 일으켰고, 그 결과 1년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1959년 그는 난데없이 ‘대통령 암살, 정부전복 음모사건’의 주모자로 몰려 갖은 고초를 겪었다.
이후에도 선생은 온 가족이 굶기 일쑤였던 생활고 속에서도 독립유공자로 이름 올리기를 끝내 거부했다. 부인까지 몸져눕게 되자 보다 못해 사위가 몰래 독립유공자로 등록해 선생은 1982년에야 ‘건국포장’을 받았다.
(발췌: 민족문제연구소 박수현 편찬실장 발표문)

   
▲ 박승극 선생.
박승극 선생
발표자 : 독립기념관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성주현 연구원
토론자 :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 박철하 전문위원

1909년 현재 화성시 양감면 정문리에서 출생한 박승극 선생은 1923년 4월 보신강습소 2학년에 입학했으나 같은 해 중퇴하고 1924년 서울 배재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1928년 배제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대학으로 유학생활을 했으며 당시 좌익계 출판물 탐독과 사회주의 수용활동을 벌이다 학업을 포기했다.
이후 박승극 선생은 1928년 카프에 가맹했으며 수원에서 조선일보 수원지국을 경영하는 한편 정문리에 신흥학당을 설립했다. 또 대회의숙, 보신강습소 등을 설치해 교육운동을 전개한 인물이다.
해방 후에는 조선문학건설본부와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 등에 참여했고 남조선문학가동맹의 중앙상무위원으로 활동했다.
1946년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에 참여해 경기지부 사무처장 및 선전부장, 중앙위원 등을 역임했다. 1948년에 월북했으며 최고인민위원회 대의원으로 선출됐고 한때 문화선전성 문학예술부장과국립출판사 사장을 역임한 바 있다.
(발췌: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소 성주현 연구원 발표문)

신상완 선생
발표자 : 한동민 수원시 학예연구사
토론자 : 김진원 화성시 학예연구사

신상완 선생은 용주사가 배출한 독립운동가 가운데 한사람이었다. 그의 출생과 죽음은 기록상 알려지지 않은 상태다. 다만 그는 적어도 1914년부터 용주사에서 총망 받는 인물이었다는 조사만이 남아 있다.
그는 3.1운동 당시 불교계를 대표해 독립운동에 직접적인 관여를 했었으며 사찰을 통한 전국적인 만세시위를 조직했다. 이어 상해 망명이후 임시정부와 연결해 동지 획득과 독립자금 모금 등에 노력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15년 설립된 불교계 최고 교육기관이었던 중앙학림(현 동국대 전신)에 진학한 그는 1919년 중앙학립을 대표하는 만세운동의 중심으로 활동했다.
1919년 3월 1일 당일 정오 파고다 공원에서 진행된 만세시위에 중앙학림 학생들과 참석, 시위대의 주력으로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3.1만세운동 이후 그는 중국 상해를 오가며 독립운동 자금 조달에 주력했다. 같은 해 그는 이종욱, 김봉신, 백성욱, 김법린 등과 협의해 대한승려연합회 선언서 및 임시의용승군헌제라는 조직을 결성했다. 이 조직은 3.1운동 직후 상해에서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신상완 선생은 1920년 2월 비밀 귀국 후 임시정부 내무부 위원으로 활동하다 같은 해 4월 6일 체포돼 징역5년을 선고받고 종로경찰서에 수감됐다. 복역 후 그는 불교계의 독립운동 선상에서 일정하게 거리를 두고 생활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발췌:수원시 한동민 학예연구사 발표문)

“뿌리와 정신을 제대로 알리고 싶습니다”
인터뷰 화성문화원 기봉서 원장

시민에게 자부심 심어주는 계기
과거 돌아보는 것, 미래여는 길

   
▲ 화성지역 인물의 애국정신을 널리 알려 화성시민에게 자부심을 심어주고 싶다는 기봉서 원장.
“화성시 하면 융건릉을 비롯해 孝의 고장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화성은 효사상 만큼이나 忠의 정신 또한 깊은 고장이라고 자부합니다”
화성의 근·현대 인물들을 재조명하는 학술회의를 준비해온 화성문화원 기봉서 원장은 화성의 뿌리와 정신을 제대로 알리는 것이 본연의 임무라고 전했다.
지난해 당성의 의의와 백제 유적에 대한 학술회의를 통해 화성의 뿌리를 찾았다면 올해 근현대사에 국익을 위해 헌신했던 인물들을 발굴해 화성의 정신을 찾아 나선 것이다.
이러한 충효예의 고장 화성시에 대한 활발한 연구를 통해 화성의 과거를 돌아보고 현재를 살펴보고 미래를 열어나가야 한다는 것이 기봉서 원장의 지론이다.
“화성은 현재 좋지 않은 이미지로 얼룩져 있습니다. 이런 이미지를 벗어 버리고 화성의 정신과 문화를 새롭게 창출해야 합니다. 그것의 시작이 바로 이러한 학술회의에 있다고 봅니다”
그는 학술대회를 시작했다는 것만으로도 큰 의의를 뒀다. 조금이나마 애국자의 정신을 화성시민에게 알려 훌륭한 고장으로서의 자부심을 심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그가 문화원장으로서의 가장 큰 보람을 느끼는 일이다.
기 원장은 앞으로도 학술대회를 통해 화성지역 출신의 훌륭한 인물들을 지속적으로 발굴해 나갈 의지를 밝혔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온몸을 바친 화성 출신 인물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연구도 없이 묻혀만 가는 것이 너무나도 안타깝습니다. 앞으로 더욱 활발한 연구를 통해 화성의 정신적인 것을 발굴해 나가겠습니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화성신문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인기기사목록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