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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홍난파의 출생지는 어디인가?
 
화성신문 기사입력 :  2023/05/29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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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난파합창단원/시민기자     ©화성신문

최근에 논란이 되고 있는 홍난파의 출생지에 대해서 자료를 밝히려고 한다. 

 

2006년 ‘새로 쓴 난파 홍영후 연보’가 발행시 처음 문제가 제기됐고 2016년 화성문화원의 ‘근대음악 콘텐츠 활용 방안 좌담회’에서는 친일 여부에 관심이 집중되어서 정작 출생지에 대해서는 주마간산 격으로 넘어갔다. 

 

필자는 홍난파의 출생지에 대해서 공론화하고 공개적으로 토의할 것을 민족문제연구소에 제안한다. 아울러 화성문화원은 출생지에 관하여 토론의 장을 열어 줄 것을 정중히 부탁드린다. 

 

먼저 홍난파의 출생지 확인부터 하려고 한다. 

 

1) 화성시 남양면 활초리 기록에 대해서 

 

황성신문 1907년 5월 14일자에는 홍영후(洪永厚)와 그의 부친 홍준의 이름이 나온다. 당시 기울어져 가는 대한제국에서 스스로 나라를 살리겠다고 모금운동을 벌렸는데 남양군 대한자강회지부에서 둔지곶면 활초동 명단에 의하면 홍준이 1환을 그리고 홍영후가 50전을 모금으로 냈다고 기록하였다. 당시에 홍난파의 나이가 9세인데 홍난파는 1939년 1월 자필 이력서에 1904년~1910년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였다고 하였으니 그 당시라고 본다. 

 

1985년 작성된 홍난파 선생 생가 복원 조사·회의 문건에 따르면 홍난파의 부인 이대형(2004년 작고)여사가 “고향인 활초리에서 난파 탄생 시 가게는 빈궁한 상태였으며”라고 증언하였음이 기록으로 남아있다. 이러한 객관적인 증거와 증언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홍난파가 활초리 출신임을 부정하려는 분들의 의도를 모르겠다. 

 

2) 경성부 정동 기록에 대하여 

 

1987년 새문안교회 사료관에서 발행한 ‘새문안교우문답책(1907~1914)’과 ‘새문안교회문헌사료집 제1집-1911년 7월 13일 현재’에 의하면 홍난파의 주소지를 경성부 정동으로 표기하였다. 어렸을 때 활초리에서 서울로 이사를 갔던 홍난파는 서양문물이 들어오는 관문인 정동에 살면서 서양음악이 도입되는 통로 역할을 하였던 새문안교회를 다녔기에 서양음악을 쉽게 접할 수가 있었다. 

 

3) 경성부 창성동 기록에 대하여

 

2002년 엔도 키미꼬가 일본어로 저술하고 문예사가 발행한 책 ‘봉선화 평전 홍난파’에 의하면 1926년 9월 28일 홍난파가 동경고등음악학원장 와타나베 이사무에게 제출한 입학원서와 서약서에 따르면 본적지란에 경성부 창성동 149번지로 기록하였다. 또한 홍난파는 자신의 여권에 1931년 5월 16일 현재 본적을 같은 주소로 기록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다만 본적과 출생지가 같은 곳인지는 확인이 더 필요하다.  

 

4) 경성부 홍파정 기록에 대하여 

 

필자가 앞서 얘기하였던 1939년 1월 홍난파의 자필로 기록한 이력서에는 홍난파의 원적 현주(原籍現住)에 경성부 홍파정 2번지 16호를 기록하였다. 그러나 이 주소의 가옥은 당초 1931년경 독일인 선교사에 의해 지어졌다가 홍난파가 이대형 여사와 재혼한 이후에 한치진 박사에게 구입한 것으로 홍난파의 출생지와는 거리가 멀다. 

 

그 외에도 1914년 행정구역이 수원군 음덕면 활초리로 변경되면서 1949년 8월 15일 이전까지 수원군으로 불렸으나 이 역시 출생지 논란과는 거리가 멀다고 하겠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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