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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신문의 전문가 칼럼 화성춘추 (華城春秋) 164]
용어의 정의
 
화성신문 기사입력 :  2022/10/04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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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원석 협성대학교교수 경영학박사     ©화성신문

 지난 학기에 중간고사가 끝나고 한 학생이 질문을 해왔다. 내용인즉, 정답을 계획적 진부화로 처리한 문제에 대해 “실례지만 중간고사 문제 중에 '계획적 구식화'는 정답으로 인정해주지 않으시는 이유가 있으실까요?”라는 것이다. 참고로 이 과목은 100명 이상의 학생이 수강하여 모두 원격 강의로 진행되었다. 보통은 “계획적 구식화는 정답이 될 수 없나요?”라고 질문하는데, 이 학생은 교수가 상상도 못한 질문을 해 온 것이다. 즉, 그것이 정답이 될 수 없는 이유를 말해주면 판단하겠다고 질문하였다. 왜 이유를 알고 싶냐고 다시 물었더니 의외의 답변이 돌아왔다. 구글에서 그렇게 적어 놓았다는 것이다. 아뿔싸, 구글 선생님이 하신 말씀을 못 알아보고 오답 처리를 하였으니 그 학생은 왜 안 되는지 이유를 물은 것이다. 

 

대학에서는 이런 혼란을 방지하고 용어를 통일하기 위해서 교과서를 사용하고 있다. 중고등학교에서 때로는 국정교과서를 채택하기도 한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용어의 정의를 통일성 있게 가르치려고 하는 데 있다. 관점에 따라서 용어의 정의는 달리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용어의 정의가 중요하다. 필자는 학생들에게 대학 과정이 ‘랭귀지 코스’라고 알려준다. 다시 말해서, 대학에서 공부하는 내용이 엄청난 것 같지만 사실은 용어의 정의를 배우는 과정이다. 전문가들끼리도 소통이 되려면 용어의 정의가 통일되어야 한다. 학술적으로 개념적 정의를 하지 않으면 더 이상 학문 연구가 어렵다. 그래서 조작적 정의를 내려서라도 용어를 정의하고 연구를 계속하게 하는 것이다. 심리학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가 사랑인데, 사랑의 정의가 합의되지 못해서 학문적 연구가 거의 없다는 것은 아이러니이다. 요즘 사랑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시작된다고 들었다. 그런데 대학은 더 이상 용어의 정의를 가르치는데 있어서 그 권위를 상실하였다. 교수가 뭐라고 가르치든, 교과서에서 용어를 어떻게 부르든 관계없이 구글 선생님이 하는 말이 진리가 되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오죽했으면 SK그룹에서는 SKMS(SK Management System)라고 용어의 정의를 책으로 만들었을까? SK그룹에서는 용어를 정의하는 책을 만들어서 대리나 과장 진급할 때 그 책에서 정의한 것을 그대로 외워서 쓰지 못하면 승진도 못한다고 한다. 필자는 SK그룹이 잘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용어의 정의가 같으면 소통하는데 불필요한 에너지를 줄이고도 소통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용어의 정의가 다르다면 같은 용어를 사용하지만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정치권에서 벌어지는 다툼을 보면 정당에 따라 용어의 정의가 다름을 느끼게 된다. 필자가 경제연구원에 근무하면서, 혹은 그 이후에 경영 컨설턴트로서 우리나라의 여러 기업들을 대상으로 조언을 해오면서 대부분의 회사들에게 한수 가르쳐줬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SK그룹에게 필자는 한수 배웠던 적이 있다. 여기에서 그때의 일을 소상히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SK그룹은 우리나라 최고의 기업임에 틀림이 없다. 

 

이제 학생에게 대답할 차례가 되었다. “구글에서 계획적 진부화가 아닌 구식화를 쓴다고 하니 하나 배웠습니다. 그리고 학생들이 교과서보다는 구글 선생님에게 물어서 답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비슷한 말이라고 해서 모두 정답으로 인정할 수는 없지요. 왜냐하면 계획적 진부화는 planned obsolescence에 대한 학술적 용어로 굳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른 학문 분야에서도 같은 용어를 우리나라에서는 달리 번역해서 서로 다른 번역 용어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계획적 구식화를 정답으로 인정해 주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학기말 고사는 오직 교과서를 표준으로 대답하고 구글 선생님께 묻지 못하게 학교 컴퓨터실에서 치르게 하려고 공지하였다. 기말고사는 교과서나 강의 노트는 보되, 구글 검색은 하지 말라는 옹색한 선생의 컨닝 금지법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오히려 다양한 답을 인정하기로 하였다. 어차피 세상은 바뀌어 가고 용어의 정의도 대세를 따라 바뀌기 마련이니 나 혼자 대세를 거슬러 갈 수는 없지 않은가? 한자어에서 유럽을 의미하는 구라파도 원래 발음은 우리파였다고 들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꾸 구리파로 발음하니 지금은 구라파로 굳어졌다고 한문 선생님께 들은 적이 있다. 그러고 보니 요즘에는 아나운서들이 우리말 용어나 발음을 잘못 사용하였을 때 그것을 지적해 주는 경우를 거의 듣지 못하였다. 오히려 아나운서들이 용어를 잘못 사용하거나 발음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앞으로는 인공지능(AI) 선생님이 하는 말이나 구글 선생님 말에 따라갈 수밖에 없는 세상이 되어가나 보다. 그러고 보니 내가 퇴직할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

 

tetkorea@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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