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 소공인을 찾아서] 최영문 이건하우징 대표 예술가 기질·열정·신뢰 무장한 ‘창호 업계 레전드’
그의 섬세한 손 거치면 평범한 대문·현관문 아닌 ‘예술 작품’ 승화
이건하우징 만의 작품을 만들기 위한 고집스러움, ‘넘사벽’ 경지
점검하고 또 점검, “내 얼굴 내 보낸다는 생각으로 제품 만들어”
신사업으로 ‘벤치’에 몰입, 차별화 기술로 “시장 5% 점유 예상”
김중근 기자
ㅣ 기사입력 :
2021/09/24 [20:08]
▲ 이건하우징 최영문 대표가 화성시의 한 전원주택에 시공한 대문 앞에서 포즈를 잡고 있다.
예술가의 기질을 가졌다. 섬세하다. 어느 누구도 쉽게 넘보지 못한다. 업계의 혹자는 그를 ‘레전드’라고 부른다. 사람들은 그의 기술을 벤치마킹하고, 심지어 도용까지 한다. 그래도 허허하고 웃어넘긴다. ‘경지’에 올랐기에 가능한 일이다.
지난해 중소벤처기업부로부터 백년소공인으로 선정된 이건하우징 최영문 대표 이야기다. 그에게 인생은 녹록치 않았다. 1962년생이니까 올해 한국 나이로 예순이다. 러시아의 대문호 푸쉬킨의 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를 연상케 하기 충분한 여정이었다. 그러나 슬퍼하지도 노여워하지도 않았다. 그저 묵묵히 굽이굽이 자신 앞에 펼쳐지는 길을 뚜벅뚜벅 걸었다. 마치 숙명이고 운명인 것처럼.
이건하우징은 창호 회사다. 대문을 만들고 현관문을 만든다. 단독 주택의 멋진 대문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런 대문이다. 그가 만드는 대문은 그냥 대문이 아니라 예술 작품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입소문을 타고 최영문 이름 세 글자는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지금은 벤치도 만든다. 사업다각화 차원에서다. 그가 만드는 벤치도 남다르다. 머지않아 국내 시장 5% 정도를 점유할 것으로 자신한다.
기술 개발만이 살 길
“꾸준히 기술 개발을 해 오고 있습니다. 매년 몇 가지씩 디자인을 바꿔가면서 새로운 제품을 출시해요. 제품을 만들 때는 내 얼굴을 내보낸다는 생각으로 만듭니다. 지금은 기술이 축적되면서 새로운 분야에 도전을 하고 있어요.”
이건하우징은 이건창호라는 회사와 별개의 회사다. 업종은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회사다. 이건하우징은 창호 업계에서는 기술력 있는 회사로 정평이 나있다. 업계의 경쟁이 심하다. 200개에서 300개로 추산되는 기업들이 자웅을 겨룬다. 화성지역을 넘어 전국을 무대로 뛰고 있는 이건하우징은 그 중에서 톱의 위치에 서 있다.
새로운 모델로 업그레이드 된 카다로그를 우편으로 발송하는 게 영업 전략이다. 새로운 거래처들을 그렇게 확보한다. 제주도와 거제도에서도 주문이 들어온다. 제품을 출하할 때는 마지막 조립 과정까지 하나씩 하나씩 검수를 거친다. 그렇게 하자가 없는 완벽한 제품을 내보낸다.
▲ 현관문을 제작하고 있는 최영문 대표.
현관문은 그동안 몇 단계에 걸쳐 진화해왔다. 초창기에는 주물판이 들어가 있는 현관문이 제작됐다. 1980년대와 90년대 고급형으로 지어진 집들의 현관문에는 산수화 그림 같은 것들이 들어갔다. 그 다음으로 유리를 조각내서 무늬 모양을 만든 현관문이 제작됐다. 이후 시스템 도어, 단열성이 있는 도어, 지금은 냉기와 온기를 완전히 차단하는 단열 도어로 발전했다.
4남 1녀 중 셋째로, 3남으로 태어난 최영문 대표는 어린 시절 기억을 떠올리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꺼내고 싶지 않을 정도로 아픈 기억들이 많아서다.
“고향이 성동구 금호동이에요. 제가 태어났을 당시에는 그렇게 못 살지는 않았죠. 아버님이 석공 일을 하셨는데 초등학교 2학년 무렵 다이나마이트를 100개 구입하셨어요. 브로커를 잘못 만나서 불량품을 구매하신 거예요. 그때 집 몇 채를 살 수 있는 돈을 다 날리고 빚더미에 앉았어요. 이런 기억이 있어요. 어느 명절날 저녁에 아버님이 일을 해서 받은 임금을 어머니께 드렸는데 빚쟁이들이 와서 다 가지고 가버렸어요. 그날 저녁에 쫄쫄 굶고 잤어요. 다음 날 큰 집에 가서 아침을 먹었어요. 지금도 생각하면 코끝이 찡하네요.”
가세가 기울자 큰 형이 중학교 졸업 후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둘째 형도 중학생이 되었을 때 등록금 마련을 위해 공장에 들어갔다. 둘째 형은 공장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야간에 공부를 해서 대학까지 나왔다. 최 대표는 공부와는 거리가 멀었다.
▲ 이건하우징 로고.
“저는 진짜 공부하고는 거리가 멀어요. 책만 보면 졸렸어요. 중학교 1학년 때 등록금을 내지 못했어요. 선생님이 불우 학생 나오라고 그러는데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어요. 결국 학교로부터 학교에 나오지 말라는 통보도 받았어요. 중학교 1학년 때 도덕 선생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공부가 싫으면 시계불알처럼 학교에 왔다 갔다 하지 말고 차라리 구두 닦기를 하든 뭘 하든 열심히 노력해서 돈을 버는 게 낫다고요. 나중에 필요성을 느끼면 그때 배움의 기회를 다시 갖는 것도 괜찮다고 하셨어요. 선생님 말씀대로 집안에 보탬이 되는 게 낫겠다 싶어서 학교를 그만두고 바로 직장생활을 시작했어요.”
미장일, 벽돌 쌓기, 전기 공사 관련 일, 목수 관련 일, 리어카 행상 등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온갖 궂은일을 했다. 19살 무렵, 다니던 회사가 문을 닫으면서 일을 그만두었다. 어린 나이에 많은 세상 경험을 했다.
군대에 현역으로 가고 싶었지만 학력이 달려 현역으로 가지 못했다. 자원하면 현역으로 갈 수 있었는데 현역 제대한 큰 형과 둘째 형 모두 극구 현역으로 가지 말라고 만류했다. 방위 제대했다. 부대에 들어가서 생활하고 아침에 출근하는 현역 방위 생활을 했다. 팀 스피리트 훈련을 두 번이나 경험했다. 운동 신경이 좋아서 태권도의 태자도 모르고 들어갔는데 입대 2주 만에 단증을 땄다. 현역으로 가지 않은 건 지금도 후회하는 대목이다.
경지에 오르다
제대할 무렵 제대하면 허송세월 보내지 말고 정말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제대 후 두부공장을 다녔는데 두 달 만에 그만두었다. 크게 배울 게 없기 때문이었다. 둘째 형 소개로 창호 만드는 회사에 들어갔다. 펜스와 방범창 같은 것을 만드는 회사였다. 기술을 배울 수 있다는 말에 솔깃했다.
용접을 해본 경험도 없으면서 할 줄 안다고 했다가 크게 곤욕을 치렀다. 거기서 두 달 정도 일을 배운 후부터 인정받기 시작했다. 눈썰미가 있고 재주가 있어서 일을 남들보다 빨리 배웠다. 그때 회사 직원이 상(喪)을 당했다. 형편이 어려운 그 직원의 도와달라는 요청을 뿌리치는 사장의 비인간적인 모습을 보면서 ‘이런 사람 밑에서는 일을 할 수 없다’며 사표를 던졌다. 회사 전무가 한사코 퇴사를 말렸지만 이미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 혈기 왕성한 스물넷의 나이였다.
마침 그 회사 과장으로 있던 사람이 시공 하청 동업을 제의해서 같이 시작했다. 그런데 그 과장이 1년 6개월을 못 버티고 나가 떨어졌다. 잠시 쉬는 동안에 서울 합정동에 있던 다른 창호 사업을 하던 사장이 공장장으로 와서 일해 달라고 제의했다. 대문과 현관문을 제조하던 회사였다.
“그 사장이 3개월을 쫓아다니더라고요. 그때 제 나이가 스물여섯 살이었어요. 그 당시 제가 학력을 속이고 창원공단에 이력서를 넣어서 합격한 상태였거든요. 고민했어요. 3개월을 쫓아다닐 정도로 끈기 있고 집념이 있는 사람이라면 같이 일 해볼 만하겠다고 생각했어요. 금호동 집에서 합정동까지 전철 타고 출퇴근했죠. 그 분 밑에서 용접을 제대로 배웠어요. 운전도 배우고. 거기서 기술을 많이 습득했죠. 입사 1년이 지날 무렵에는 제 밑으로 직원이 세 명이 생기더군요.”
그런데 그 사장에게는 단점이 있었다. 뒤에서 남의 욕을 하는 나쁜 버릇이 있었다. 어느 날 사장에게 이야기했다. “근거 없이 저를 욕하시면 그때 바로 그만두겠습니다.” 입사 1년 6개월 만에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다. 그 길로 퇴사했다.
차를 하나 사서 프리렌서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시공하는데 누구보다 잘 할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저기서 콜이 왔다. 당시 기술자 월급이 60만 원 70만 원 정도 할 때였는데 문 하나를 설치하면 5만 원을 벌었다. 하루에 세 건도 하고 네 건도 했다. 업계에서는 최영문 만큼 일 잘하는 사람이 없다는 평판이 돌았다. ‘시공의 레전드’라고 불릴 정도였다.
31살에 수원으로 내려왔다. 임대공장에서 둘째 형과 동업을 시작했다. 사업자는 형 이름으로 냈다. 회사 이름은 이건금속이었다.
“기술력은 제가 다 갖고 있었어요. 영업은 형님이 하고. 제가 아는 동생 둘을 데리고 왔어요. 동생들은 야근까지 하며 열심히 일했어요. 저도 그 무렵에 결혼했고요. 그런데 형님이 수당을 챙겨주라는 제 말을 안 듣더군요. 1년 정도 됐을 때 그 친구들이 야밤에 다 도망갔죠. 일 시키고 노력한 만큼 돈을 못 받았으니까요. 저도 형님과 등을 져서 그만뒀어요. 투자한 만큼만 돈을 받아서 나왔어요.”
1년 가까이 쉬다가 1995년도에 군포에 하나로패션도어라는 회사를 차려서 부속품을 판매하는 영업을 시작했다. 서른넷의 나이였다. 순식간에 적자가 5천만 원으로 불어났다. 첫 애를 안고 눈물을 흘리며 비닐하우스 안에 공장을 차렸다. 직접 제조를 했다. 1년 6개월 만에 빚을 다 갚을 정도로 사업이 잘 됐다. 그 무렵 둘째 형이 하던 현관문 제조업체는 적자에 허덕이고 있었다. 형이 최 대표에게 회사 인수를 제안했다. 1999년도에 수원에 있던 회사를 인수했다.
▲ 시공 완료된 현관문.
“나는 내가 생각해도 참 대단한 사람”
“지금도 형님한테 고마운 게 있어요. 같이 동업해서 자리 잡았던 회사를 형님이 욕심내서 다 가지고 갔지만 IMF가 와서 적자가 나는 회사라도 뒤늦게 나한테 넘겼다는 거예요. 다른 사람이 아니고. 나는 회사를 인수하면 잘 할 자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형님에게 고맙다고 얘기 했죠. 인수 후에 돈을 잘 벌었어요. 2002년도에 땅 주인이 공장을 비워달라고 해서 지금 이곳 화성으로 이전했어요. 자재만 5톤 트럭으로 다섯 대 분량이었어요. 회사 이름도 그때 이건하우징으로 바꿨어요. 2월 25일입니다.”
최 대표는 이건하우징 만의 제품을 만들고 있다. 현관문에 사용되는 금형들을 직접 만든다. 이건하우징 제품은 다른 곳에서는 팔지 못한다. 최 대표는 자재 욕심이 많다. 알루미늄 자재만 50톤 정도를 확보하고 있다.
“이건하우징만 쓰는 제품을 만들고 있어요. 우리 회사가 다른 회사랑 차별화되는 지점이 바로 그 지점입니다. 제 아이디어로 만든 제품을 도용해서 쓰는 사람들도 있어요. 웃고 말지요. 어떻게 하겠어요.”
이건하우징의 단열 도어는 자체 개발을 통해 특허 등록된 제품이다. 다른 회사 제품들에 비해 월등하다. 더 튼튼하면서도 가격은 더 저렴하다. 얼마나 견고하게 만들었든지 하자가 발생하는 경우가 없다.
▲ 최 대표가 사업다각화 차원에서 몰입하고 있는 옥외 벤치.
이건하우징은 사업다각화 차원에서 옥외용 벤치에 공을 들이고 있다. 제품명은 ‘월드 파크 벤치’다. 조달청에 물품 등록된 상태다. 3년간 17억 원어치 제품을 팔 수 있다는 계약 조건으로 나라장터 쇼핑몰에 제품을 올려놓은 상태다. 특허 받은 제조 기술을 접목한 알루미늄 패널 사용, 친환경 소재인 TPV 소재 접목, 접착제를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탁월한 내구성 등의 장점을 가지고 있다. 최 대표는 이름이 알려지면 국내 시장의 최소 5%는 점유할 것으로 예상한다. 매년 두 배 정도의 성장을 기대하고 있다.
최 대표는 지금 새로운 제품에 도전하고 있다. 일명 ‘스마트 벤치’다. 태양광을 이용해서 전기를 발생시켜서 벤치에 조명이 들어오게 하고, USB 충전, 벌레 퇴치 기능 등을 갖춘 의자다. 현재 60% 정도 개발된 상태다.
“가방끈은 짧지만 지금 충분히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많은 사회적 경험과 지식을 보유하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조달청 물품 등록도 컨설팅 도움 없이 혼자서 다하고 조달청 계약 따는 것까지 직접 제 손으로 다 했으니까요. 재가 생각해도 참 대단한 것 같아요. 하하.”
정이 많고 모질지 못해서 손 벌리는 사람을 뿌리치지 못한다는 최 대표. 지금까지 그렇게 주머니에서 나간 돈이 수억 원이다. 최 대표가 ‘좋은 사람’으로 불리는 이유 중 하나다. 나이 60이 된 지금도 ‘엄마야 누나야’ 노래를 부르면 그냥 가슴이 뭉클해지고 눈물이 쏟아진다.
“노력하면 안 되는 게 없어요. 노력한 만큼 얻어지는 게 삶의 이치예요. 인생은 붓을 들고 있는 화가 같은 거예요. 똑같지 않은 그림을 매일 그려야 하니까요. 그림을 조금 더 잘 그리려고 계속 노력하고 도전하는 거죠. 짧은 인생, 정직하게 사랑하며 살아야죠.”
김중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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