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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 초대석] 최광범 광흥에스피주식회사 대표
“1번 주자 되는 길? 트렌드 잘 읽으면 나아갈 방향 보이죠”
“자기 확신 중요, 한 발 앞서 생각하고 한 발 먼저 내딛어야”
독보적 기술, 세계 유일 6채널 시스템 마스크팩 충진기 제작
“앞으로 협동화로봇 대세 될 것, 로봇에 우리 프로그램 접목”
두 딸이 붙여준 애칭 ‘멈추지 않는 전차’, “인생은 장기 레이스죠”
 
김중근 기자 기사입력 :  2021/03/05 [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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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래 먹거리인 협동화로봇의 장점을 설명하고 있는 최광범 대표.  © 화성신문


  

어떤 분야든 1번 주자, 퍼스트 펭귄(first penguin)이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퍼스트 펭귄은 남들보다 먼저 용기를 내서 도전하는 사람을 말한다. 자기 확신이 있을 때라야 가능한 일이다. 자기 확신은 시장의 흐름을 정확하게 읽을 줄 알아야 얻을 수 있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다. 물론 축적된 경험도 있어야 하고 부단한 연구도 있어야 한다.

 

동탄일반산업단지에 위치한 광흥에스피주식회사 최광범 대표가 그런 사람이다. 1번 주자다. 트렌드를 읽고 늘 한 발 앞서 생각하고 한 발 먼저 내딛는다. 사업 초창기 우여곡절도 겪었지만 퍼스트 펭귄을 추구했기에 생존할 수 있었고 성장가도를 달릴 수 있었다.

 

광흥에스피주식회사는 화장품과 관련한 회사다. 마스크팩 충진기와 충진 체크 유닛을 제작한다. 지난해부터는 협동화로봇을 화장품에 접목한 비즈니스를 펼치고 있다. 이 세 가지가 핵심 제품군이다.

 

주력 제품인 마스크팩 충진기는 파우치에 화장품 용액을 집어넣고 밀봉하는 기계다. 특허를 세 개나 가지고 있을 정도로 탁월한 기술력을 자랑한다. 국내에는 경쟁사가 없다. 마스크팩 충진기를 만들 수 있는 국내 유일 회사다. 중국에서도 값싼 기계를 만들지만, 품질이나 생산량 측면에서 광흥에스피 제품과는 비교가 안 된다. 기계 성능이 좋아 한 번 써본 고객은 추가 발주를 하게 된다.

 

“6열이라고 해서 채널이 여섯 개가 있어요. 6채널 시스템은 저희 광흥에스피 밖에 없습니다. 세계 유일이죠. 한꺼번에 6열이 동시에 움직입니다. 12열도 만들 수 있지만, 크게 의미가 없어요. 후공정에서 사람들이 포장할 때 인력이 더 필요하게 되니까요. 6열이 가장 적절해요.”

 

▲ 독보적인 기술력을 자랑하는 마스크팩 충진기.  © 화성신문


  

TPC메카트로닉스 한국공식대리점 자격 취득

 

또 하나의 주력 제품인 충진 체크 유닛도 독보적인 기술을 자랑한다. 충진 시 용량이 정확하게 담겨야 한다. 충진 체크 유닛은 용량이 정확하게 담겼는지 여부를 체크하는 장치다. 광흥에스피 기술의 강점은 충전을 하면서 초음파로 무게를 잴 수가 있다는 것이다. 결과를 나중에 알 수 있는 것과는 정반대의 개념이다.

 

정확한 토출이 핵심 기술이다. 토출은 노즐에서 용액이 나가는 것을 말한다. 정량액 토출 기술도 특허 등록됐다. 에센스 용량은 보통 3~50g이다. 오차 범위는 플러스마이너스 0.2g. 고객이 30g을 요구하면 30g이 토출되도록 세팅하고, 50g을 요구하면 50g을 넣도록 세팅하면 된다.

 

최광범 대표가 최근 역량을 집중하고 있는 분야가 협동화로봇이다. 202012, TPC메카트로닉스로부터 한국공식대리점 자격을 취득했다. 협동화로봇이 대세가 될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앞으로 세계적으로 인력난이 올 것으로 예상해요. 열악한 환경이나 사람이 할 수 없는 작업 같은 분야에 로봇을 사용하게 될 겁니다. 우리 회사가 로봇을 만드는 게 아녜요. 대기업에서 만든 로봇을 사다가 고객이 요구하는 사항을 우리의 기술로 충족시키는 겁니다. 우리가 개발한 기구물과 알고리즘, 프로그램을 로봇에 접목시켜서 생산시스템을 구축하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는 로봇 엔지니어링 기술을 갖고 있는 겁니다.”

 

화장품 기계 제작 전문업체인 광흥에스피가 협동화로봇을 가장 먼저 접목한 분야도 화장품이다. 국내 굴지의 화장품 기업에서 이미 여러 대를 수주해놓은 상태다.

 

1964년생인 최 대표는 어떻게 이 길을 걷게 됐을까. 중학교 선생님의 조언이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어려서부터 홀어머니를 모시고 어렵게 자랐어요. 중학교 때 기술선생님이 한양대 기계공학과를 나오신 분인데, 저의 어려운 사정을 아시고 공업고등학교에 가서 취업을 빨리하는 게 도움이 될 거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서울공고 기계과를 추천해주셨어요. 3학년 1학기 때 서울 양평동에서 종이컵 만드는 현진제업이라는 공장에 취업했어요. 지금은 종이컵 업계에서 큰 기업이죠. 그 당시는 환경이 너무 열악했어요. 2개월 만에 그만두고 학교로 돌아와서 공부를 했어요. 대학에 진학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계속 공부를 하고 있었거든요.”

 

서울공고를 가게 된 동기도 당시 동일계 진학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학교에서는 같은 계열 공고생을 30% 뽑는 시절이었다. 당시는 서울공고에서 서울대에 60명이 합격할 정도였다. 그런데 고등학교 2학년 때 동일계 진학이 없어졌다. 희망이 사라진 것이다. 시험을 봐서 중앙대 기계공학과에 입학했다. 당시 서울공고에서 대학에 입학한 두 명 중 한 명이었다.

 

대학 1학년 때도 가정형편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조흥은행 남산지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오후 530분에 들어가서 다음날 오전 9시에 나왔다. 은행직원 한 명과 같이 숙직을 했다. 하루 일당이 4,500원이었다. 아르바이트를 몇 개월 하면 학비를 마련할 수 있었다. 당시 한 학기 학비가 45만 원이었다. 여름방학 때는 집 짓는 곳에서 날품도 팔았다. 일을 하다 보니 학점이 좋게 나올 리 없었다.

  

 

▲ 취미가 사진촬영인 최광범 대표가 찍은 사진. 담양 메타세콰이어 길.  © 화성신문

 

▲ 화성상공회의소 기업인 산악회에서 간 강원도 태백시 함백산의 겨울 풍경.  © 화성신문


 

기술영업 줄곧 1, ‘내 사업하고 싶어 창업

 

대학교 4학년 말에 화천기계라는 중소기업에 취직했어요. 1989, 제 나이 스물여섯이었어요. 서울 양평동에 본사가 있었는데, 공작기계로는 유명한 회사였어요. 고등학교 때 기계를 만지면서 성장해왔기 때문에 학교에 취업 의뢰가 들어왔을 때 지원을 했죠. 기술영업을 하게 됐어요. 기술영업을 하면서 성장하는 계기가 됐어요. 제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됐던 것 같습니다. 노원구 공릉동에서 홀어머니를 모시고 지하 월세방에 살았어요. 직장에서 급여를 받게 되면서 생활이 안정됐어요. 한 달 월급은 27만 원 정도였어요.”

 

생활이 안정되니 결혼을 해야겠다는 마음이 생겼다. 조흥은행 남산지점에서 아르바이트 할 때 럭키금성상사에 다니던 여직원을 알게 됐다. 럭키금성상사가 조흥은행과 거래를 했던 것이다. 은행 공식 근무시간 이후에는 인적사항을 쓰고 은행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그게 인연이 돼서 결혼을 하게 됐다. 직장에 입사한 그 해에 결혼까지 한 것이다. 주택은행에서 대출 받고 전세방을 얻었다.

 

기술영업하면서 실적이 좋았어요. 1995년도에 퇴사할 때까지 한 번도 1등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2등은 저 스스로 용납이 안 됐어요. 고객이 요구하면 토요일도 일요일도 없었어요. 제가 처음 맡았던 지역이 안산 반월공단지역이었어요. 자동차부품 공장이 많았는데 주문량이 컸죠. 그때 저는 차도 없었어요. 하얀 와이셔츠를 하루만 입어도 새카맣게 될 정도로 돌아다녔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그렇게 열심히 살았던 것이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는 원동력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영업실적이 좋으니까 입사 3년차에 회사에서 사택을 주더군요. 사택은 평택에 있었어요. 어머니를 모시고 있어요. 어머니를 모실 수 있는 심성 착한 여자를 골랐거든요. 하하.”

 

줄곧 영업실적 1등을 할 수 있었던 이유가 궁금했다. 어린 시절 이야기를 꺼냈다.

 

어렵게 살아서 그런지 어려서부터 생활력이 강했어요. 안양에 살던 초등학교 5학년 때는 가판 신문을 팔기도 했었어요. 가판에서 50전을 주고 신문을 사서 전철역 같은 곳에서 1원에 팔았어요. 5원짜리가 나오기 전이었죠. 또래 아이들에 비해 제일 많이 팔았어요. 6학년 때 안양에 수해가 나서 집이 다 떠내려갔어요. 서울 답십리 이모님댁 옆으로 이사를 가게 됐습니다. 서울에 입성하게 된 계기였죠. 바로 중학교 진학을 못했어요. 배정을 못 받았거든요. 1년을 쉬었어요. 1년 동안 신촌에 있던 새한제본사라는 성경책 만드는 곳에서 일했어요. 점심 때 라면도 끓이고, 이런 저런 시키는 일을 했죠. 주로 꼬마역할을 했었죠.”

 

영업실적 1등까지 하며 승승장구하던 시절이었는데 왜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을까.

 

회사에서는 1994년도에 당시 불모지였던 수원지역을 최 대표에게 맡겼다. 수원사업소장을 하면서 개척하라는 의미였다. 법원사거리 4층 건물 3층을 임대해서 개척하기 시작했다. 영업을 하면서 지역사회 선배와 지인들이 사업하는 모습을 보며 나도 사업을 해야 겠다는 마음을 먹게 됐다. 1995년도에 퇴사를 실행에 옮겼다.

 

퇴사 후 바로 그해에 광흥종합기계라는 회사를 차리고 제조업에 뛰어들었다. 화성시 능동(당시는 능리) 60평 임대공장이 기업인 최 대표의 첫 걸음이었다. 오랫동안 영업을 한 터라 거래처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됐다. 자동차 핸들에 들어가는 부품인 파워 스티어링 튜브를 생산했다. 지인들의 도움으로 1년 만에 큰 오더를 받게 됐다. 반도체 부품이었다. 매출이 크게 늘면서 꽤 성장하게 됐다. 그러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았다. 1997년도에 IMF가 터진 것이다.

 

“내 몸 속에 어려움 견뎌내는 DNA 있는 것 같아

 

받은 어음이 다 부도가 났어요. 12,000만 원이었어요. 저에게는 큰돈이었죠. 기계가 10여대 있었는데 정리하고 두 대만 갖고 지인이 운영하는 공장 귀퉁이 20평 공간을 얻어서 새로 시작했습니다. 그때가 1998년도였어요. 동탄 산척리였는데 지금은 동탄호수공원이 됐죠. 정말 열심히 일해서 성장 기반을 만들었어요. 2002년도에 산척리 인근 지역에 부지 300여 평, 건평 120평 공장을 사서 옮겼어요. 나이 마흔둘에 처음으로 자가 공장을 갖게 된 겁니다.”

 

영업 귀재인 최 대표가 직접 영업을 하다 보니 오더는 항상 많았다. 그런데 엔지니어들이 속을 썩이기 일쑤였다. 단납기 오더를 받아오면 처리하기 힘들다며 꼬장을 부렸다. 최 대표는 직원들을 다 내보내고 직접 기계를 만지면서 부품을 생산했다. 공업고등학교를 나왔고 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했기에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낮에 영업해서 받은 오더를 밤에 가공해서 그 다음날 납품했어요. 고객들은 매우 만족했죠. 회사에서 먹고 자며 거의 밤낮없이 일했어요. 2004년도부터 성장을 많이 했어요. 직원도 순식간에 10명으로 늘더군요. 그때 돈을 좀 벌었어요. 동탄 금곡리에 공장 세 동이 지어져 있는 600평 땅을 사서 임대를 줬어요. 그러다가 LCD 시대를 맞게 되면서 더 성장하게 됐죠. 2008년도에 동탄신도시가 들어서면서 산척리 공장이 수용돼 금곡리 공장으로 들어가게 됐어요. LCD 부품으로 성장하고 나서 반도체 장비 부품, LED 부품을 생산하면서 회사가 크게 성장했어요. 제가 영업을 하다보니까 산업의 흐름을 잘 쫒아간 거죠. 어느 부분이 호황이라고 생각되면 바로 그 분야 오더를 받아오는 식이었으니까요.”

 

지금의 위치인 동탄산단에는 2015년도에 왔다. 광흥에스피주식회사를 새로 설립했다. 트렌드에 맞춰 마스크팩 충진기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집중적으로 투자해 인프라를 구축했다. 이듬해인 2016년은 한류 문화콘텐츠를 제한하는 중국의 한한령(限韓令)이 본격화되면서 화장품 시장은 거의 고사상태까지 갔었다. 지금은 어느 정도 회복된 상태다. 최 대표는 2020년부터 협동화로봇에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최 대표는 “내 몸 속에 어려움을 견뎌내는 DNA가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그에게는 두 가지 버킷리스트가 있다. 하나는 상장사를 운영해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어보는 것이다. 상장사를 운영하는 것은 우회적으로 이뤄냈다. 지인들과 함께 투자해서 상장사를 인수한 것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2년 뒤 60세 기념으로 실행할 생각이다.

 

멈추지 않는 전차. 장성한 두 딸이 최 대표에게 붙여준 애칭이다. 긍정 마인드 소유자인 최 대표는 인생은 장기 레이스라고 말한다. 일희일비 하지 않고 목표를 향해서 꾸준히 가다보면 성공이 따른다는 믿음에서다. 사진 찍으려고 산에 오르다 산을 좋아하게 됐다는 최 대표. 보기 플레이어인 그는 지난해 10월 기흥CC에서 홀인원하기도 했다. 그가 가슴에 새기고 있는 문장 하나는 초심을 잃지 말자.

 

김중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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