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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난파 홍영후를 생각하며(中)]
음악가는 음악으로 평가받아야
 
화성신문 기사입력 :  2020/09/28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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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왕로 백석대학교 문화예술학부 교수/화성심포니 오케스트라 지휘자     ©화성신문

얼마 전 남북한 정상이 만났을 때 축하곡으로 난파 홍영후가 작곡한 ‘고향의 봄’이 불렸다. 북한의 정상들도 따라 노래하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이산가족 상봉에서 남북한의 가족이 합창으로 고향의 봄을 노래하는 장면도 있었다. 우리가 북한의 주민들과 소통할 수 있는 음악은 지금의 노래가 아니라 분단 이전의 노래들이다.

 

‘전선야곡’은 모성애와 애국심을 갖게 하는 곡이지만 그 작곡가 박시춘은 친일 인명사전에 올라있다. 북한은 친일 반민족주의자들을 처단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산가족 상봉에서 북한 아버지가 남한 딸에게 불러준 ‘애수의 소야곡’(박시춘 작곡)은 북한이 예술을 정치화 하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우리의 노년세대가 신세대 음악이 정서에 맞지 않는 것처럼, 북한의 연세 드신 분들도 선동과 출정의 내용을 바탕으로 하는 북한음악이 정서에 맞지 않을 것이다. 일제강점기 때 음악 작품들은 자유롭지 못한 시대의 창작품이지만 우리의 애환을 담았다. 이제 남북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기억하며 쉽게 노래할 수 있는 ‘봉선화’ 같은 동요와 가곡의 교육이 필요하다. 

 

얼마 전 한국계 미국인 연주자를 만났다. 우리나라에 온 지 꽤 오래 됐지만 우리말은 거의 못하고 영어를 사용했다. 최고의 대우를 받고 있는 그는 여러 대학교에 출강을 나간다고 했다. 우리나라에서 활동하는 해외 출신 음악인들 중에는 우리말을 안 배우는 사람들이 많다. 영어를 사용할 때 인정을 더 받을 수 있다는 게 이유다.

 

일제 강점기 시절 우리 지식인들 중 많은 사람이 일본어를 사용하며 서구식 생활을 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우리말을 배우지 않고 영어를 사용하며 서구식 문화를 추구하는 사람들과 차이는 무엇일까. 우리말 사용을 고집한 홍난파의 창작산문집 가치를 다시 한 번 음미해보게 되는 대목이다. 영어나 일본어가 아니라 우리말로 무언가 행위를 할 때 고취되는 것이 애국심이다. 

 

김용이 쓴 무협소설 ‘신조협려’에는 곽정 대협의 딸 곽양이 소녀시절 원나라 국사 금륜법왕에게 납치되는 장면이 나온다. 곽양은 살기 위해 그를 사부로 모시지만 진심이 아니었다. 양과에 의해 구출된 곽양은 이후 아미파의 창시자가 되어 원나라에 저항한다.

 

20세기의 가장 뛰어난 작곡가 중 한 사람인 러시아의 쇼스타코비치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넘치는 교향곡 5번과 레닌그라드가 독일군에 의해 포위됐을 때 교향곡 7번을 작곡했다. 7번 교향곡은 시민들이 고난과 인내로 승리하는 기쁨을 표현했다. 하지만 그는 이후 서방의 자유주의 곡을 만들었고, 징계를 받았다. 그 이후에는 다시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넘치는 작곡으로 포상을 받았다.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음악가는 오로지 자신의 작품으로만 평가를 받아야 한다.

 

필자는 남양읍 활초리 홍난파 생가 옆에 특설 무대를 만들어서 음악회를 개최한 적이 있다. 관객으로 참석한 J씨는 탈북 바이올니스트였다. 그가 말한 북한 음악은 대중들이 흔히 부르는 아리랑과 홍난파의 가곡이었다.

 

북한의 백고산은 6·25 전쟁 후 인민군 합주단으로 북한에 충성하며 동 베를린 콩쿠르에서 3등상을 받아 모스크바 음대에서 유학했다. 1978년 모스크바 차이콥스키 콩쿠르의 바이올린 부문 심사위원으로 위촉되면서 국제적 권위를 인정받았다. 이 콩쿠르는 세계 3대 콩쿠르의 하나인데, 그의 생애 마지막까지 심사위원에 임명될 정도로 백고산의 명성은 동유럽과 러시아의 바이올린 계에서 확고했다.

 

백고산은 1930년생으로 평양에서 태어났다. 트럼펫 정윤민 교수와 동향 동년배다. 정윤민은 해방된 후 평양에서 김일성 콩쿠르에서 우승했지만, 월남해 국립교향악단 수석단원으로 활동했다. 서울대 음대에서 제자를 육성하기도 했다. 윤이상 관현악단의 주요 단원들이 백고산 제자들이다. 북한  체제에서 충성을 다한 백고산과 월남한 정윤민의 다른 점이다. 

 

박태준, 현제명, 김성태, 이재옥, 김생려 등 우리나라 음악대학교와 교향악단을 성장시킨 1세대 음악가들이 홍난파의 영향으로 성장했다. 백고산과 정윤민 같은 음악가들은 1세대의 뒤를 이어 해방 후의 남북한에서 활동했다.

 

어린 시절 배웠던 홍난파 동요와 가곡은 평생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지금의 교과서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북한 음악에 대해 연구할 때, 일제 강점기 작품 연구를 통해 남북의 공통점을 찾아야 한다. 화성시가 추진하다 친일 논란으로 멈춰선 난파기념관 재추진이 그 중심에 있어야 한다.

 

kingro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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