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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난파 홍영후를 생각하며(上)]
홍난파 둘러싼 친일파 논쟁 멈춰야
 
화성신문 기사입력 :  2020/09/21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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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 왕 로화성심포니·청소년교향악단 지휘자     ©화성신문

우리나라 근대음악사에서 가장 먼저 도입된 서양악기는 트럼펫이다. 충정공 민영환이 1896년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참석해 그곳 군악대를 보고 감명 받아 트럼펫을 얻어 가지고 돌아왔기 때문이다. 대원군의 쇄국정책과 청일전쟁 후 을미사변·아관파천으로 이어진 복잡한 정치 상황을 고려한다면, 다른 서양악기보다 빨리 도입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민영환이 고종에게 군악대 창설을 건의해 대한제국의 군악대가 창설되었고, 일본에서 활동 중이던 독일 지휘자 프란츠 에케르트를 초빙하였다. 에케르트는 완전히 백지였던 군악대를 연주할 수 있는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대한제국의 애국가도 만들었다. 미스 손탁의 손탁호텔과 금강채굴권 등 대한제국의 후원으로 운영되던 군악대는 일제 강점기의 시작과 더불어 사라지면서 후대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서편제로 알려진 국악은 일제 강점기의 문화말살 정책으로 어려웠음을 알고 있지만, 우리가 사용하는 서양음계로 이루어진 음악은 우리나라에서 또 다시 백지 상태가 되었고 일본식 창가를 배우며 우리 것을 찾기 어려워졌다. 이러한 시점에 난파 홍영후가 탄생했다. 이 불세출의 음악가는 우리나라에 서양음악의 씨를 심으며 불모지를 개척했다. 우리나라로 봐서는 식민시대 근대음악의 문을 열 수 있었던 행운이었다.

 

난파는 김형준으로부터 음악을 배웠고, 김형준의 딸 김원복은 피아니스트로 난파의 조카며느리가 되어 훗날 서울음대 교수로 후배를 양성하였다. 김원복 교수와 함께 서울음대 설립에 공헌한 이재옥 교수는 관악 지도교수로 최근 국기에 대한 경례의 저작권을 국가에 기증한 이교숙과 활동했고, 우리나라 대학교에 관악 합주가 자리 잡도록 지도하며 윈드 오케스트라의 체계를 정립하였다.

 

현재 많은 음악가들이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며 대한민국의 자긍심을 높이고 있지만, 사실 우리나라 최초의 작곡가, 지휘자, 바이올린 연주, 음악 이론서 집필자, 음악 교육자, 문화 계몽가 등 천재 음악가였던 난파가 식민시대의 음악을 새로 그렸고 발전시켰기에 가능한 일이다.

 

난파가 태어난 화성시 남양읍 활초리의 고향의 봄 길을 편도 1차선 좁은 시멘트 길로 가다보면 초등학교 교과서에 사진으로 실렸던 초가지붕의 난파 생가가 나온다. 화성시가 매입한 생가 일원 1만3천 평 부지는 서양음악의 우리나라 도입에 가장 큰 공헌을 한 난파를 기념하는 공간으로 준비되어 있다.

 

1898년 4월 10일 화성시 남양읍 활초리에서 태어난 홍난파의 ‘봉선화’와 ‘고향의 봄’은 3.1운동 직후인 1920년경에 작곡됐다. 창가만 배우던 일제 강점기에 우리 손으로 만든 우리의 노래였다. 나라를 빼앗긴 민족의 설움을 애절하게 표현해 널리 애창됐다. ‘금강에 살으리랏다’, ‘봄처녀’, ‘성불사의 밤’, ‘옛 동산에 올라’와 같은 가곡과 ‘달마중’, ‘낮에 나온 반달’, ‘고향의 봄’과 같은 동요는 해방 이후의 음악 교과서를 통해 한국인에게 친숙한 노래가 되었다.

 

난파는 모차르트의 주피터 교향곡을 초연시킨 지휘자로서 오케스트라의 체계 확립에도 이바지했다. 그는 시카고의 셔우드음악원에서 유학했으며, 흥사단에서 활동했고, 계몽운동을 펼치던 수양동우회 멤버로 활동하다 1937년 일본 경찰에 체포돼 72일간의 모진 고문을 당한 후 4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강압적인 일제의 치하에서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며 음악활동을 한 것을 두고 오늘날 일부에서는 난파를 친일파라고 부른다.

 

1919년 3.1만세운동이 격렬했던 화성시에서는 남양 홍씨들이 치열하게 독립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투옥돼 죽임을 당했다. 난파는 핍박받은 친족의 아픔을 ‘봉선화’로 작곡해 간절함을 표현했다. 불과 19년 지난 1938년 쯤 친일 행적이 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홍난파가 활동하던 일제 강점기에는 음악가의 사회 전반에 대한 영향력도 없었고, 정치나 권력과도 거리가 멀었으며, 극도로 활동이 제약되었던 시기이다.

 

난파의 이름을 딴 많은 단체들이 활동하며 후대에 영향을 주고 있다. 하지만 난파의 삶은 왜곡돼 이해되고 있다. 안타깝게도 돌아가신 분은 말을 하지 못한다. 난파의 일생을 대변할 용기 있는 후배 음악가는 드물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근대 음악사의 역사 기록이 제대로 남아있는 기념관이 없다. 단국대학교의 난파 기념관과 서울 홍파동의 홍난파의 집에 유품과 기록물이 있을 뿐이다.

 

이제 난파를 둘러싼 소모적인 친일파 논쟁은 멈춰야 한다. 난파의 고향 활초리에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음악가를 기릴 기념관을 만들어야 한다. 졸속으로 짓지 말고, 전문 음악인의 자문을 받아 제대로 건립해야 한다. 난파 홍영후 기념관이 후손들의 긍지를 높여 줄 것으로 확신한다.

 

kingro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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