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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 초대석] 박준남 경동산업㈜ 대표 “끊임없는 변화 추구, ‘예스팀바’ 외치는 준수한 남자”
친환경합성목재 국내 선두, 전국 지자체서 품질 인증
고교 졸업 후 1년 사회생활, “인생 공부 확실하게 했죠”
2019년 11월 창립 20주년 기념, 전 직원에게 ‘골드바’ 선물
‘그 사람’ ‘그 놈’ 소리 듣지 말아야, 철저한 자기관리 강조
 
김중근 기자 기사입력 :  2020/01/31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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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사 집무실에서 포즈를 잡고 있는 박준남 대표.     © 화성신문

 

준수한 남자. 박준남 경동산업대표가 자신을 소개할 때 사용하는 표현이다. 1995년 아마추어무선사 시절에 자기소개용으로 사용하던 닉네임을 지금도 이메일 애칭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제 하나의 고유 브랜드가 됐다.

 

부모님께서 준남이라는 이름으로 저를 준수한 남자로 만들어주셨어요. 돌이켜보면 이 애칭이 제 인생을 이끌어온 원동력이었습니다. 나 자신을 과장되게 표현하지 않으면서도 약간 올려주는 느낌이 들거든요. 자존감이 높은 것도 아마 그 때문일 거예요. 나태해질 때마다 준수하게 살도록 저를 줄기차게 밀어붙이는 추진력이기도 했고요.”

 

박 대표와 10분 정도만 이야기를 나눠보면 그의 매력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매력 포인트는 편안함과 친근감. 그 바탕엔 유머감각이 있다. 천상 안동 양반이다. 타고난 성품 탓도 있겠지만, 라이온스 클럽과 한국표준협회, 중소기업융합경기연합회, 경기도기업경제인협회 등 회원수 700, 1,000명 되는 여러 단체들의 회장직을 수행하면서 몸에 밴 품격 때문이리라.

 

경동산업은 친환경합성목재를 만드는 회사다. 대표 브랜드는 예스팀바(Yes Timber). 국내 최초로 KS 인증을 받은 제품이며, 조달청 우수제품이다. 자연과 함께하는 친환경합성목재라는 뜻을 지닌 예스팀바는 기존 목재의 문제점을 획기적으로 보완한 제품이다.

 

목분과 합성수지를 압출 성형한 제품으로, 나무와 수지의 장점을 최대한 살린 것이 특징이다. 수분과 해충에 강하고, 내구성이 탁월하다. 기존 나무에 비해 강도가 월등히 높으며, 방부목과 달리 인체에 무해하다.

 

2007년도에 탄생한 예스팀바는 모든 것에 다 통한다는 의미의 예스(Yes)와 나무를 의미하는 팀바(Timber)의 합성어로, 그 이름처럼 다양한 곳에 활용된다. 대표적인 분야가 바닥에 까는 데크용, 울타리로 쓰이는 펜스용, 건물 외벽에 붙이는 사이딩용이다.

 

 

▲ 경동산업이 설치한 해안 데크.     © 화성신문

 

 

너 대학 가려면 이 스타킹 팔아라

 

경북 안동에서 1962년도에 태어난 박 대표는 초등학교 6학년 2학기 때 서울로 전학했다. ‘남자는 대처로 가야 한다하는 부모님의 판단이었다. 서울에는 13살 차이나는 큰 형님이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다. 시골에서 나름 공부를 한다고 했었지만 서울 아이들을 따라갈 수 없었다. 한동안 방황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서울에서 졸업했다. 고등학교를 나왔으니 대학은 안 가도 된다고 생각했다. 부모님과 형은 대학에 가야한다고 했지만, 황소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집에서는 대학을 가든가 은행을 가든가 결정하라고 했다. 은행 시험 준비한다고 집에서 받은 돈으로 친구들과 놀러 다녔다. 드럼도 배웠다.

 

고등학교는 상업고등학교를 나왔다. 3학년 때는 주산부기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졸업 후 구로공단에 있는 회사에 취직했지만 입사 3개월 만에 회사가 문을 닫았다. 화성시 정남면에서 붕대와 거즈를 만드는 회사에 들어갔다.

 

붕대라는 게 하얀 백색이잖아요. 원단은 누른색입니다. 기계로 원단을 둘둘 말아서 큰 통에 넣어요. 약품처리 하는 거죠. 약품처리 된 원단을 고압호수로 뿌리면 탈색이 됩니다. 그걸 한겨울에 장화 신고 밟아요. 너무 힘들었어요. 내가 이걸 해야 되느냐. 명색이 고등학교 나왔는데 대우를 받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거예요. 그때 제가 정신을 차렸습니다. 공부해야 되겠구나. 6개월 일하다 나왔습니다. 두 회사를 거치는 1년 동안 인생 공부 확실하게 했죠.”

 

 

▲ 경동산업 본사가 위치한 1공장 입구에서 사진촬영에 임한 박준남 대표.     © 화성신문

 

 

박 대표는 부모님과 형 몰래 공부를 시작했다. 대학에 합격했는데 학비가 필요했다. 부모님께 간절히 이야기도 하고, 형에게 며칠 동안 빌기도 했는데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어느 날 형이 박 대표를 동대문으로 데리고 갔다. 버스에 올라타서 판매하는 물건들을 파는 가게들이 줄지어 있었다. 형이 말했다.

 

너 대학 가려면 이 스타킹 팔아라. 이거 할 수 있으면 내가 입학금 대 준다.”

 

실습이 필요했다. 버스 판매 경험이 많은 사람을 따라 버스에 올랐다. 파는 방법을 보니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3일째 되는 날 독립을 선언했다.

 

판타롱 스타킹, 밴드 스타킹, 팬티 스타킹을 들고 버스에 올랐어요. A4용지 두 장 분량의 시나리오를 다 외웠는데도 말문이 막히는 거예요. 그렇게 성과 없이 오르락내리락을 몇 번을 했어요. 그러다 결정했죠. 차라리 종이를 꺼내서 읽자. 고객 설득에는 솔직한 게 최고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꾸벅 인사를 하고 회사가 부도나기 직전이어서 회사를 살리기 위해 이 자리에 섰으며, 경험이 없어서 읽을 테니 양해 부탁드린다고 했더니 승객들이 모두 웃는 거예요. 그리고는 읽어 내려갔죠. 그런데 뜻밖에 잘 팔리더군요. 오전 서너 시간만 하고도 2만 원 정도 벌었어요. 수입이 괜찮았어요. 대학에 입학해서도 몇 개월 더 스타킹을 팔았어요. 재미있었어요. 돈도 벌고. 나중에 알고 보니 부모님이 이미 입학금을 내놓았더군요. 그런데도 인생경험 해보라고 아무 말씀 없으셨던 겁니다. 덕분에 사람들 앞에 설 수 있는 자신감을 얻었지요. 설득력도 키워진 것 같고.”

 

박 대표에게는 장성한 아들과 딸이 하나씩 있다. 아들이 중학교 다닐 때부터 공부 안 해도 된다고 이야기 했다고 한다. 언젠가는 느낄 때가 있을 거라고, 그 깨닫는 시기가 빨리 올수록 인생살이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경험에서 우러나온 조언과 함께.

 

 

▲ 친환경합성목재는 건물 인테리어용으로도 제격이다.     © 화성신문

 

 

내가 봤을 때 자네는 사업할 사람이야

 

군 제대 후 대학을 졸업했다. 전공은 전기과였다. 그런데 지도교수가 다른 친구들은 삼성전자와 같은 큰 기업들에 취직을 시켜주면서도 자신은 취직을 안 시켜주었다. 그래서 찾아가서 물었다.

교수님, 왜 저는 취직을 안 시켜주시는 겁니까?”

 

교수가 대답했다.

 

자네가 미워서 그런 게 아니야. 이해해 주게. 내가 봤을 때 자네는 사업할 사람이야. 삼성전자에 넣어줄 수도 있어. 하지만 통장 반장 청소부를 모두 경험할 수 있는 회사를 찾고 있는 중이라네. 삼성전자에 가면 한 가지만 배울 수 있어. 차라리 작은 회사에 가면 회사 전체를 다 배울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해서 1987년도에 취직한 회사가 화성시 정남면 덕절리에 있는 전구제조회사 세우실업이었다. 직원 60명 규모의 이 회사에서 박 대표는 지도교수의 말대로 많은 걸 배웠다. 생산관리, 제품시험검사, 총무, 인사, 무역까지 전천후로 다 커버할 수 있을 정도로.

 

1990년에 회사에 노조가 생겼다. 어릴 때 돌봐줬던 직원들의 사장 물러가라는 요구에 정나미가 떨어진 회사 사장은 박 대표와 공장장 등 세 명에게 회사 인수를 제의했다.

 

자네들이 회사를 인수해라. 임대료만 달라. 사업해서 벌어들인 이익금은 분배를 하자.”

 

그래서 세 명은 그해 회사를 인수했다. 각자 500만 원씩 보증금을 넣었다. 매출도 괜찮았지만 문제가 생겼다. 세 명 중 본의 아니게 소외감을 느낀 한 명이 반발했다. 그래서 2년 정도 운영하던 회사를 매각하고 회사를 나왔다. 1992년도의 일이었다. 500만 원 투자해서 벌어들인 수천만 원은 몇 개월 후 결혼자금으로 사용됐다.

 

취직을 위해 서류를 네 곳에 넣었는데 모두 합격했다. 고민 끝에 계열사 4곳을 둔 서경통상이라는 회사에 입사했다. 그 무렵 이 회사는 오산에 공장을 지었고, 건축자재 제조를 처음 시작할 때였다. 기계는 독일에서 들여왔다. 기술 최고 책임자로 근무하던 박 대표는 독일 출장에서 합성목재라는 아이템을 알게 됐다. 그 당시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 이거 괜찮은데. 해볼 만한 사업이야.’ 결국 이 아이템은 나중에 박 대표의 밥줄이 됐다. 내 일을 해보고 싶다는 욕망에 19999월 사표를 제출했다.

 

분양 받은 아파트를 담보로 3,000만 원 대출받아 199911월에 평택시 서탄면에서 사업을 시작했어요. 따져 보니까 직원 한 명 두고 한 달 매출 1,000만 원이면 충분히 될 것 같았거든요. 그런데 막상 회사를 여니까 오더 준다고 하던 사람들이 안 주는 거예요. 월 매출 300만 원정도 되더군요. 아내에게 준 퇴직금을 달라고 했지요. 아내가 그러더군요. ‘사업 하다가 잘 안 되면 우리 부모님 집 지하로 들어가면 돼.’ 아내의 그 말이 큰 힘이 됐어요. 서탄면 공장 일부를 저렴하게 임대 준 사장님하고는 지금도 만나고 있어요. 나도 기계 한 대가 있었지만, 그 분이 자신의 기계를 사용할 수 있도록 배려해 줬거든요. 저에게는 은인이지요.”

 

그렇게 회사는 성장했고, 2001년도에 화성시 봉담으로, 그리고 2007년도에 다시 지금의 양감면으로 이전했다. 평택시절에는 산업용부품을 만들었다. 사세를 확장해 봉담으로 와서는 건축자재도 생산했다. 양감시대를 맞아서는 봉담시절 개발한 예스팀바를 주력으로 생산하고 있다. 조강지처 격인 산업용부품도 일부 생산하고 있다.

 

현재 경동산업은 양감면에 제1공장, 2공장, 3공장을 가동하고 있다. 친환경합성목재 국내 선두주자다. 공장은 전자동화 시스템으로 가동되고 있다.

 

 

▲ 화성시 양감면에 위치한 경동산업 1공장 전경.     © 화성신문

 

 

‘Good 3’ 추구, 좋은 환경, 좋은 생각, 좋은 품질

 

지난해인 201911월이 20주년 되는 달이었다. 전 직원과 일본으로 연수를 갈 계획이었지만 일본의 백색국가(화이트리스트) 배제 조치에 포기했다. 대신 직원들에게 깜짝 선물을 해주었다. ‘골드바를 선물한 것이다. 근속 연수별로 돈 수를 달리했다. 거래처에는 감사의 마음을 담은 행운의 열쇠를 전달했다.

 

경동산업의 비전과 가능성이 궁금했다.

 

우리 회사는 계속 진화하고 있어요. 원천기술을 갖고 있으니까 새로운 아이템 개발이 수월합니다. 최근에는 기존 예스팀바 제품 안에 알루미늄을 같이 넣어서 결합시킨 제품을 개발했어요. 시공 공정이 크게 줄었죠. 앞으로도 다양한 방법으로 제품을 업그레이드시킬 겁니다. 자전거가 페달 밟는 걸 멈추면 넘어지잖아요. 우리 경동도 끊임없이 변신하고 진화할 겁니다. 여름철에 직사광선으로 받은 열을 바로 방출시킬 수 있는 제품이 곧 개발될 겁니다. 표면 온도가 뜨거워지지 않는 거죠. 전국 지자체 담당 공무원들이 우리의 품질을 인정하고 써주는 데는 이유가 있지 않겠어요.”

 

박 대표가 희열을 느끼는 순간이 있다. 공장 증설 같은 큰 게 아니다. 추구하던 제품이 개발되고, 품질 인증을 받는 순간들이다. 사람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기에 가능한 일이다. 경동산업에는 ‘Good 3’가 있다. 좋은 환경, 좋은 생각, 좋은 품질이다. 사훈이다.

 

살아오면서 직원이든 거래처든 그 사람’, ‘그 놈이라는 소리를 안 들을 정도로 처신하는 게 제 원칙입니다. 철저한 자기관리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죠. 베푸는 마음으로 모나지 않고 둥글둥글하게 살 겁니다. 인생 마지막 끝 날까지 준수한 남자로 살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성공한 삶을 산 게 아닐까 싶어요.”

 

합성목재 선구자인 박 대표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이 있다. 회사 직원들이 나가서 회사를 차려 사장소리를 듣는 것이고, 그 사장들이 경동 출신이라는 소리를 듣는 것이다. 너무 소박한 꿈일까.

 

김중근 기자 news@ihs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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