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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갑을관계에 대해서
신도성 시민기자
 
화성신문 기사입력 :  2019/09/02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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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도성 시민기자     ©화성신문

수원지방법원 모 판사가 몇 년 전에 경상일보에 기고한 글의 일부이다. “계약서 맨 위에 편의상 한쪽 당사자를 ‘갑(甲)’, 다른 당사자를 ‘을(乙)’로 지칭하고, 이후 계약 조항에서 ‘갑’ ‘을’ 이라고만 적는데, 대부분 ‘갑’ 당사자가 ‘을’ 당사자보다 상대적으로 우월한 지위에 있다는 점에 착안해서 갑을관계라는 말이 생겼다.” 

 

언제부턴가 우리 귀에 너무도 익숙해져서 잊어질 만하면 들려오는 뉴스가 되어버린 ‘갑을관계’ 또는 ‘갑질’에 대해서 알아본다. 승용차를 운전할 때마다 느끼는데 내가 운전할 때와 차에서 내려 보행자가 되어서 남이 꼴불견으로 운전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에 느끼는 감정은 완전히 상반된다. 내가 운전할 때는 설령 교통신호를 조금 무시하고 속도제한을 초과하는 경우에도 있을 수 있다고 본인에게 관대하다. 그렇지만 내가 보행자가 되었거나 택시나 버스의 승객이 되어서 운전자 옆에 앉게 되면, 자연스럽게 운전기사가 신호는 지키는지, 제한속도를 초과해서 과속하지 않는지를 감시하는 감독관이 되려는 경향이 있다. 나아가 내가 운전기사를 감시하지 않으면 마치 택시 또는 버스가 사고를 일으켜 엄청난 인명피해가 발생하지 않을지 불안해 하는 사람도 있다.

 

영원한 갑도 없고, 또한 영원한 을도 없는 것을 우리는 잘 알면서도 너무도 쉽게 상황이 변화하면 자신의 스탠스를 순식간에 바꾸는 카멜레온의 유전자가 있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기실 정치권의 가장 흔한 유행어가 되어버린 ‘노블레스 오블리주 noblesse oblige’ 또는 ‘내로남불-내가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도 따지고 보면 자신에게 들이대는 도덕적·법률적 잣대와 상대방 행위에 대해서 판단하는 기준이 엄연하게 다름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싸우면서 닮는다.”는 말이 있다. 상대를 비난하면 할수록 내가 미워하는 그 상대방을 닮아간다는 아이러니한 뉘앙스를 지닌 이 말은 따지고 보면 맞는 말이다. 사춘기 때에 몹시 미워했던 부모님의 모습 태도와 심지어는 말투까지도, 아니 웃을 때에 보조개까지 어찌 그리 부모님의 모습과 빼닮았던지. 남도 놀라지만 사실은 자신이 스스로를 보면서 더 놀란다. 개인만 그런 것은 아닌 것 같다. 여당이든 야당이든 자리가 바뀌면 자신의 과거 정책과 언행은 깨끗하게 잊어버리고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자신이 그동안 그토록 남을 비난하던 그 말이 부메랑이 되어서 자신에게 되돌아와 겨냥하는 경우를 하도 많이 접해서 이제는 뉴스도 아닌 만큼 흔하다. 

 

오죽하면 옛날 어른들이 역지사지(易地思之)라고 말하였을까를 곰곰이 생각한다면 답은 의외로 자신의 옆에 있고 실천은 의외로 쉬울 수가 있다. “나는 커서 어른이 되면 결코 엄마처럼(또는 아빠처럼) 살지 않을 거야.”라고 외치지만 어느새 자신의 언행에서 묻어나는 부모님의 모습을 지울 수도 없거니와 그럴수록 오히려 더 자연스럽게 표출되고 있는 것을 어쩌겠는가? 

 

오늘도 자신이 ‘을’이기에 ‘갑질하는 갑’에 대해서 신랄하게 비난하는 뉴스 등을 보면서 통쾌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면 언제까지나 ‘을’의 범주에 머무르고 말 것인가? 훗날 나도 ‘갑’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오더라도 저버리고 영원히 ‘을’에 머무를 것인가? 아니면 ‘을’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는 ‘슈퍼 갑’이 되어서 과거 ‘을’의 기억을 까마득하게 잊지는 않을지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 “너희가 높아지고자 하느냐? 낮아지리라, 그리고 낮아지고자 하느냐? 내가 너를 높이리라.” 세상 일이 마음대로 그렇게 억지로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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