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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황 명확한데도 기록에 이름 없다고 독립유공자 안 된다니…”
화성시 팔탄면 하저리 이성규․이운상 옹, 1919년 발안시장 만세운동 참여했다 봉변
죽도록 매 맞고 실신해 발안천 제방에 버려진 이성규 옹
일본 순사 총검에 찔려 내장 다 쏟아져 나온 이운상 옹
“일본 문헌 기록 있어도 이름 없다는 이유로 독립유공자 선정 안 돼”
 
김중근 기자 기사입력 :  2019/08/12 [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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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부(祖父)의 독립유공자 선정을 위해 4년 전부터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는 이백영 씨가 문헌 기록을 설명하고 있다.     © 화성신문

 

“화성시 팔탄면 하저리에도 독립유공자 두 분이 있었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려야 합니다.”

 

화성시에서 조상 대대로 살고 있는 이백영(79, 사진) 씨는 조부(祖父)의 독립유공자 선정을 위해 4년 전부터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다.

 

이 씨를 지난달 31일 하저1리 경로당에서 만났다.

 

이 씨에 따르면 조부 이성규(李星圭, 1940년 사망) 옹은 1919년 4월 5일 41세 나이로 화성시 발안시장 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일본 관헌에 체포돼 모진 고문을 받은 후 남은 인생을 힘들게 살다 사망했다.

 

만세운동 당시 이 씨의 조부는 화성시 향남면 파출소(당시 주재소로 불림)에서 일체의 식사 제공도 받지 못한 채 수일간 갖은 고문을 당하다 실신했고, 사망한 것으로 판단한 일본 관헌들에 의해 가마니에 둘둘 말린 채 향남면 발안천 제방에 버려졌다고 한다.

 

파출소 인근에서 근황을 살피던 이 씨의 조모와 부친이 조부를 집으로 모셔와 지극정성으로 간호한 끝에 겨우 의식을 차렸지만, 몸이 망가진 조부는 사회생활을 제대로 하지도 못한 채 삶을 영위하다 환갑의 나이에 고인이 됐다.

 

자손들 “독립유공자 선정으로 명예회복 시켜 드리는 게 후손의 도리”

 

“만세운동 당시 일본이 만든 문헌에 보면 하저리 출신 사망자 1명, 부상자 1명이 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그 사망자가 바로 우리 할아버지입니다. 부상자 1명은 일본 순사의 총검에 찔려 내장이 다 나올 정도로 심한 상처를 입은 분입니다. 이 두 분이 발안시장 만세운동에 참여했다는 일본 문헌 기록도 있고, 그 기록에 있는 두 사람이 우리 할아버지와 총검에 찔린 다른 한 분이라는 증인이 있는 데도 독립유공자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후손으로서 얼마나 죄송한지 모릅니다. 불효막심이지요.”

 

2000년도에 과천시 부이사관(3급)으로 정년퇴직한 이 씨는 세월이 흐르면서 자손으로서의 도리를 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수소문 끝에 일본 문헌에 기록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 기록은 ‘제암리 3.1운동 순국유적지 활성화 방안 연구’ 자료(2014년 4월)에 인용되기도 했다.

 

이후 이 씨는 광복회와 국가보훈처 등 안 다닌 곳이 없을 정도로 다니며 조부의 국가유공자 선정을 위해 노력했지만 지금까지 결실을 맺지 못하고 있다.

 

“손자인 제 나이가 이제 곧 80이 됩니다. 무슨 혜택을 바라는 게 아닙니다. 선대 할아버지께서 독립운동하다 일본 놈들한테 그렇게 매를 맞고 힘들게 사시다 돌아가셨는데 자손으로서 이건 도리가 아니지요. 제가 눈 감기 전에 조부님을 꼭 독립유공자로 선정되게 해야 합니다. 제 인생의 마지막 과업입니다.”

 

이 씨는 1957년도에 나라에서 독립유공자 전수조사를 위한 신청을 받았다고 했다. 하지만 자신이 너무 어려서 제대로 알지 못해 기회를 놓쳤다고 했다.

 

“제가 너무 어려서 신청을 못했어요. 나중에라도 했었어야 하는 건데 못했습니다. 그때는 주변에서 보증만 제대로 서줘도 독립유공자로 해줬다 그러더군요. 요즘은 실제 이름이 밝혀지지 않으면 안 해준다고 하네요. 그 당시에 수원법원으로 넘어간 사람들은 이름이 기록돼 있는데 향남 파출소에서 즉결 처분된 사람들은 이름이 없습니다. 일본 문헌에도 기록이 남아 있고, 정황상 우리 할아버지가 독립유공자임이 명확한데도 단지 이름이 기록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씨는 동네 사람들이 증인이라고 했다.

 

“옛날에 우리 동네에선 독립운동하신 분이 누구냐 그러면 우리 할아버지하고 창검에 찔리신 다른 한 분을 이야기 했어요. 우리 할아버지처럼 그 분도 신고를 하지 않았다고 하네요. 저나 그 분 자손들이나 조상에게 면목이 없는 건 매한가지네요.”

 

하저리에 살고 있는 이찬영(86) 씨는 그 당시의 일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우리 할아버지하고 이성규 씨하고 4촌 간입니다. 옛날에 이백영 씨 할머니한테 그런 이야기 수시로 들었어요. 하천둑에다 버려진 걸 거적을 들춰보니 숨을 쉬어서 집으로 데리고 왔다고 했어요. 이성규 씨 장례 모시던 날 아주 비가 많이 왔어요. 여섯 살 땐가 그랬어요. 상여를 메고 가던 모습을 처마 밑에서 본 기억이 납니다.”

 

▲ 이규면 씨가 제적등본에 적힌 조부의 이름을 가리키며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 화성신문

  

이운상 옹 “내가 죽더라도 명예회복 될 수 있기를…”

 

발안시장 만세운동 때 이성규 옹과 함께 참여했다가 불상사를 당한 이운상(李雲相, 1976년 사망) 옹의 손자 이규면(61, 사진) 씨도 하저리 경로당에서 만났다.

 

이 씨는 자신의 할아버지에 대해 이렇게 묘사했다.

 

“저희 할아버지는 3.1운동 때 만세운동 하다가 일본 순사의 창검에 찔려 내장이 다 쏟아져 나왔다고 합니다. 당시 21세셨습니다. 수원에 있는 도립병원으로 옮겨 의사들이 위와 장을 절제했다고 하더군요. 이후 일본 순사들이 찾아왔는데 침대 밑으로 숨겨서 모면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할아버지 살아계실 때 보니까 손도 잘 못쓰시더군요.”

 

이 씨는 조부가 평소에 식사를 많이 하지 못했다고 했다. 모내기를 하다가도 팔다리가 저려 오래 하지 못했다고도 했다.

 

“몇 년도인지 정확히 모르지만 5~6월경에 동아일보에 할아버지의 이름이 게재됐다고 합니다. 1960년대 초반에 나라에서 주는 밀가루를 서너 번 받았다고 합니다. 동네에 다 나온 게 아니고 할아버지 집에만 나왔다는 이야기를 할머니와 어머니한테서 들었습니다. 근거가 있으니까 배급을 받은 것이겠지요.”

 

이 씨에게 바람이 무엇인지 물었다.

 

“할아버지의 큰 딸이 생존해 계세요. 38년생이신데 서울에 살고 계세요. 할아버지가 생전에 ‘내가 죽더라도 과거에 이런 일이 있었으니 명예회복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고 하더군요. 하루 빨리 할아버지께서 독립유공자로 선정돼 명예회복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독립유공자 선정을 위한 심사는 매년 11월, 1년에 한 번 실시된다. 이백영 씨와 이규면 씨는 일본인의 손에 의해 고생하다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명예회복과 후손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 올해도 서류를 접수할 계획이다.

 

경로당 문을 나서는 기자에게 이백영 씨가 말했다.

 

“독립유공자로 선정되는 날 두 다리 뻗고 잘 수 있겠지요. 우리 하저리 마을에도 자랑거리가 될 테고요.”

 

김중근 기자 news@ihs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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