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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수수께끼 그림 김홍도 풍속화 - ⑨ 노상풍정(路上風情)
김홍도 풍속화 분위기, 정조의 국정실패에 따라 희망에서 절망으로
 
화성신문 기사입력 :  2019/07/01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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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보물 제527호 <<단원풍속도첩>>(일명 김홍도 필 풍속도 화첩)에 수록된 풍속화 25점은 국민그림으로 널리 사랑받는다. 하지만 명성에 걸맞지 않게 김홍도가 직접 그린 작품인지에 대한 논란이 제기되어 지금껏 정리되지 않은 상태이다. 실제 전문적인 안목이 없더라도 찬찬히 관찰하면 의문점을 도처에서 발견할 수 있다. 매주 화성신문 지면을 통해 독자들과 함께 상식의 눈으로 <<단원풍속도첩>> 풍속화에 숨어있는 수수께끼를 풀며 정조와 김홍도가 살았던 시대를 여행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 <노상풍정> <<단원풍속도첩>>,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화성신문

 

▲그림1 <<단원풍속도첩>> 중 <신행> 부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화성신문

 

▲그림2 <<단원풍속도첩>> 중 <노상풍정> 부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화성신문

▲그림3 <<단원풍속도첩>> 중 <노상풍정> 부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화성신문

 

▲그림4 <<단원풍속도첩>> 중 <노상풍정> 부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화성신문

 

▲그림5 <<사계풍속도병>> 중 <노상풍정> 부분, 김홍도, 연도미상, 기메 국립 아시아 박물관 소장     © 화성신문


▲ 트릭. 계획된 신체묘사의 오류 및 비일상적인 상황 설정

 

① 양반의 말몰이 소년 맨발이다. <<단원풍속도첩>> 중 <신행>의 청사초롱을 들고 가는 소년 역시 맨발이다.(그림 1) 사실적인 풍속이 아니라. ‘그림 속 틀린 부분 찾기’처럼 감상자의 주의력을 테스트하는 트릭이다.

 

② 아낙 뒤를 따르는 사내가 쓴 갓에는 무관이 쓰는 전립(戰笠)처럼 구슬 형 끈이 달려있다.(그림 2) 

 

▲ 잡설. 김홍도 풍속화 화풍 희망에서 절망으로 

 

김홍도는 소를 탄 여인과 말을 탄 양반이 조우하는 도상을 즐겨 그렸다. 그러나 마주치는 여인과 양반의 태도는 사뭇 다르다. 본 작품 <<단원풍속도첩>> <노상풍정>에 등장하는 여인은 장옷을 들추고 양반을 곁눈질하지만, 도리어 양반은 부끄러운 듯 눈을 감고 지나간다.(그림 3) 1778년 작 <<행려풍속도병>> 중 <노상풍정>에서는 여인이 호기심이 발동한 듯 장옷을 들추고 쳐다보자 양반도 은근하게 눈을 마주친다.(그림 4) 하지만 연도미상(1790년대 중반 이후로 추정) 작 <<사계풍속도병>> 중 <노상풍정>에 등장하는 여인은 관리를 마주치자 죄인처럼 고개를 숙였고, 관리는 거드름을 피우며 여인을 쳐다본다.(그림 5) 여인이 능동적으로 눈길을 던졌을 때는 자유와 개방, 눈길을 피할 때는 구속과 폐쇄의 분위기가 느껴진다. 

 

김홍도 풍속화의 분위기 변화는 정조의 국정운영과 무관하지 않은 듯 보인다. 여인이 먼저 눈길을 보내는 본 작품 <<단원풍속도첩>> 중 <노상풍정>과 1778년 작 <<행려풍속도병>> 중 <노상풍정>(그림 4)은 정조 재임 전반기 작품으로 추정된다. 

 

1776년 즉위한 정조의 최대 국정목표는, 천형 같은 성리학 원리주의·무본억말·숭명반청의 사슬을 끊고 가난과 낙후에서 탈출하는 것이었다. 개혁지지 세력들의 기대는 컸다. 김홍도도 풍속화를 희망으로 채색했다.

 

반면 여인이 눈길을 피하는 연도미상 작 <<사계풍속도병>> 중 <노상풍정>(그림 5)은 정조 재임 후반기 작품으로 추정된다. 1791년 ‘진산사건’이 발생하자 천주교와 서학의 탄압이 시작됐고, 1792년에는 ‘문체반정’이 있었다. 공안정국이 시작됐다. 국정반대파들은 몸을 사렸다. 기선을 제압한 정조는 국력을 총동원하여 '화성성역'을 강행했다. 

 

1794년 2월 28일, 화성성역의 첫 삽을 뜬다. 반대파들과 백성들은 경제가 어려운 시기에 불요불급한 성을 쌓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심지어는 진시황의 만리장성에 비유하기도 했다. 확보된 예산도 없었다. 극심한 자연재해까지 연이어 닥친다. 1794년 10월19일, 공사를 잠정 중단하기로 결정한다. 6개월 후 재개된 성역은 1796년 10월에 끝났다. 착공 34개월 만이었다. 국가 1년 예산의 40% 정도인 87만3,520냥이 투입되고, 연인원 37만6,342명이 동원된 대역사였다. 하지만 1796년 10월 16일 거행된 화성낙성연에 정조는 홍역 창궐을 이유로 참석하지 않았다. 

 

정조에게 화성성역은, 성을 쌓음과 동시에 기술을 개발하고, 공업을 발전시키며, 도로망을 구축하고, 상업과 무역을 촉진시키며, 농업개발의 틀을 세우는 종합경제개발이었다. 1796년 10월 완공된 화성은 공장에 비유하면, 건물만 지었을 뿐, 기계설치·직원교육·시험가동·대량생산·판매 등등 무엇 하나 손도 못댄 상태였다. 정조에게 1796년 완공된 화성은 유형의 성일 뿐, 성 안에 쌓아야 할 무형의 성은 아니었다. 조선을 근본적으로 개혁하는 무형의 성을 쌓는 작업은, 유형의 성이 완공되자 도리어 중단됐다. 경제와 민심이라는 기반이 붕괴됐기 때문이다. 정조가 화성낙성연에 참석하지 않은 이유이다.

 

화성성역으로 국가재정은 파탄나고 백성의 삶은 도탄에 빠졌다. 늘어난 건, 백성들의 고통이요 듣기 싫은 상소 뿐이었다. 정조는 금령(禁令 언로를 통제하는 령)을 남발했다. 상소는 올려봐야 ‘삼베 잠방이에 방귀 새듯’ 허공으로 사라졌다. 신료들의 불만은 극에 달했다. 사안에 따라, 정조의 우호세력이었던 남인과 노론 시파들까지 가세했다. 성균관 유생들은 수업을 거부했고, 대신들은 연명으로 상소를 올린 후 낙향하기로 결의했다. 광해군 말기와 같았다. 왕권은 상소에 대한 비토권 행사가 전부였다. 정조의 승부수였던 화성성역은 그렇게 처절하게 실패했다. 그 무렵 김홍도 풍속화의 분위기는 ‘긍정적’에서 ‘부정적’으로 변했고, 희망은 절망으로 변색됐다.

 

주찬범 향토작가 news@ihs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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