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광고
광고
수수께끼 그림 김홍도 풍속화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기획연재] 수수께끼 그림 김홍도 풍속화 - ⑤ 행상
정조 시대 농업유민 행상
 
화성신문주찬범 향토작가 기사입력 :  2019/05/27 [10:43]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보물 제527호 <<단원풍속도첩>>(일명 김홍도 필 풍속도 화첩)에 수록된 풍속화 25점은 국민그림으로 널리 사랑받는다. 하지만 명성에 걸맞지 않게 김홍도가 직접 그린 작품인지에 대한 논란이 제기되어 지금껏 정리되지 않은 상태이다. 실제 전문적인 안목이 없더라도 찬찬히 관찰하면 의문점을 도처에서 발견할 수 있다. 매주 화성신문 지면을 통해 독자들과 함께 상식의 눈으로 <<단원풍속도첩>> 풍속화에 숨어있는 수수께끼를 풀며 정조와 김홍도가 살았던 시대를 여행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 <행상> <<단원풍속도첩>>,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화성신문

▲그림1 <<행려풍속도병>> 중 <매염파행> 부분 확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화성신문

 

▲그림2 <<단원풍속도첩>> 중 <행상> 부분 확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화성신문

▲ 그림3. 지게 명칭     © 화성신문

▲그림4 <품 팔러 다니는 사람>, 김준근     © 화성신문

 

▲ 트릭. 계획된 신체묘사의 오류 및 비일상적인 상황 설정

①여인 더벅머리다. 

 

②아기를 포대기 대신 상의 속에 넣고 업었다. 김홍도의 1778년 작 <<행려풍속도병>> 중 <매염파행> 도상과 유사하다. 머리에 인 광주리 형태도 같다.(그림 1)  

 

③사내는 정체불명의 모자를 쓰고 있다. 방한모처럼 보이지만, 모자챙은 위쪽으로 접혔고, 귀 덮개 부분은 수평으로 빳빳하다. 보편적인 풍속이 아닌 관찰력을 시험하는 함정이다.(그림 2)

 

④지게작대기를 비정상적으로 잡고 있다. 왼손과 지게작대기 사이로 오른손을 넣어 잡으면, 팔이 꼬인다. 일상에서 취할 수 없는 자세이다.(그림 2)

 

⑤짐을 받쳐주는 ‘지게 가지’가 초승달처럼 휘었다. 곧은 나무로 만든다.(그림 3) 지게에 나무통을 진 형태 또한 묘하다. 지게 사이에 끼어놓은 건지, 줄로 묶어 고정한 건지 불분명하다. 역시 비일상적인 상황이다.

 

▲ 잡설. 김홍도 시대 행상.

# 농업사회 붕괴

조선은 농업을 장려하기 위해, 상업과 공업은 억제하는 ‘무본억말(務本抑末)’정책을 고수했다. 성리학원리주의 사회를 지향하기 위해서다. 산업의 동반성장기회는 원천 봉쇄당했다. 극단적인 중농정책은 도리어 농업사회를 붕괴시키는 역설이 됐다.

 

농사만 지어야하는 백성들은, 농지를 확장하기 위해 과도하게 임야를 개간했다. 온돌문화의 보급으로 땔감수요도 급증했다. 홍수나 가뭄의 충격을 1차 흡수할 산림이 훼손됨에 따라, 자연재해는 숨 돌릴 틈 없이 이어졌다. “삼국시대 이후 한반도에서 발생한 홍수를 분석하면(1930년대 시점), 신라시대는 평균 33년에 1회, 고려시대에는 9년에 1회, 조선시대에는 5년 혹은 7년에 1회, 조선후기에는 4년에 1회 꼴로 빈도가 점점 잦아졌다.”* 도쿠미쓰노부유키, <<역주 조선의 임수>>, (사)생명의숲국민운동 역주, 지오북, 2007 

 

정조 시대는 밭을 갈아엎어 논으로 만드는 반전(反田)사업이 증가했고, 이앙법이 전국에 걸쳐 보급된 시기였다. 생산량이 높고, 노동력이 감소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내기철에 물을 공급하지 못하면 그 해 농사는 포기해야만했다. 농업용수 확보 없이 이앙을 하는 것은 도박과 다름없었다. 수리시설을 독자적으로 축조할 능력이 없는 농민들이 의지할 수 있는 농업용수는 빗물이 전부였고, 많아도 적어도 안됐다. 1년이 풍년들면, 2~3년 흉년은 다반사였다.

 

흉년이 들면, 농민들은 하루를 살기 위해서 환곡을 빌려 입에 풀칠을 했다. 그럼에도 국가는 기아를 구제하기는커녕 농민을 수탈했다. 예컨대 환곡이자를 받을 때 공식이자는 6개월에 10%였지만, 쌀값의 실거래가격이 상정가보다 비싼 춘궁기 때는 동전으로 빌려주고, 쌀값 시세가 상정가보다 하락한 추수 이후에는 현물상환만 받았다. 봄철에 쌀 1가마를 빌려주었으면, 가을에 이자까지 합산해서 1.1가마를 돌려받아야 함에도, 봄철에 쌀 1/2가마를 살 동전을 빌려주고, 가을에는 동전이 아니라 쌀 1.1가마로 갚으라고 했다. 화성성역 이후 환정은 더욱 문란해졌다. 원금의 3~4배(6개월)를 지불하는 살인적인 환곡이자까지 등장했다. 

 

농민들은 땅을 버렸고, 빼앗겼다. 소작을 하며 연명하려 했지만, 지주의 착취와 국가의 수탈은 날이 갈수록 더 심해졌다. 조선은 유산계급을 비호하고, 그 몫까지 무산계급에게 전가시켜 재정을 운영했다. 대다수 농민들은 토지가 없음에도, 세금 ·군역·강제노동 등의 부담은 점점 더 늘어났다. 수탈의 덫에서 탈출하기 위해, 양민의 신분을 포기했다. 노비·유민 ·품팔이꾼으로 전락했고, 불법으로 채굴하는 광산에 갔다. 여인들은 술을 팔았다. * <<정조실록>> 1794년 7월 22일 농업유민의 대다수는 서울로 몰려들었다. 

 

# 상업

조선은 상업을 협잡으로 불로소득을 올리는 말업이라고 멸시했다. 도시가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상설시장이 많을 수도 없었다. 유통은 5일장 등과 같은 장시 그리고 행상에 의존했다. 운송의 낙후로 무게가 나가고 부피가 큰 공산품의 유통은 불가능했다. 

 

“도시의 발달과 상업의 발달은 정비례한다. 조선은 시장 발달을 나타내는 중요한 지표인 도시화 율은 매우 낮았다. 1800년경, 1만 명 이상의 도시의 인구는 총 40만 명 내외로 총인구를 1,600만 명으로 가정하면 그 2.5%를 차지했다. 인구 5,000명 이상의 도시는 3.8% 정도였고, 읍치와 시장을 가진 소도시까지 포함하면 전국 도시화 율은 6%로 추정된다. 당시 중국과 일본의 도시화 율은 각각 7~8%와 18%로 조선보다 높았다. 18세기 러시아를 제외한 유럽의 인구 5,000명 이상의 도시 인구의 비율은 12%로 추정되고, 전 세계의 도시화 율은 9~10%로 추정된다. 반면 조선은 인구밀도는 높았지만, 도시화 비율은 낮았다. 결과적으로 조선은 상업을 발전시킬 기반이 조성되지 않은 상태였다.”*이헌창, <근대경제성장의 기반 형성기로서 18세기 조선의 성취와 그 한계> 

 

시장은 최소한의 공간이면 족했다. 서울에만 상설시장 ‘시전’을 설치하고 임대료와 세금을 걷었다.(개국 초 개성에도 있었다.) 부담은 과도했지만, 독점권은 특혜였다. 시전상인은 계급이 미천하다 보니 권력에 밀착해야만 살아남았다. 영업보다 상납이나 뇌물이 중요했다. 시장질서는 왜곡됐고 가격담합과 폭리가 판을 쳤다. 부당하게 취한 이익은 세도가나 탐관들과 나눠 가졌고, 고스란히 국가와 백성의 부담이 됐다. ‘시전’은 사회주의국가의 국영상점과 같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시전을 위협하는 신진상업세력이 등장했다. 정부의 허가를 받지 않은 사상들이다. 생산지와 소비지 서울을 연결하는 포구상인들이 부상대고로 급성장했다. 자금력과 유통망 그리고 정보수집능력에서 시전을 압도했다. 금난전권이 미치지 않는 교외에 자리를 잡고 서울시장을 공략했다. “정조 재위 5년차인 1781년 칠패·이현 두 시장의 어물거래액이 시전 어물전에 비해 10배나 많았다.” *박은숙, <<시장의 역사>>, 역사비평사, 2010 

 

그 틈에서 서울에 몰려 온 농업유민들이 불법상인 밑에서 품팔이를 하거나, 행상 또는 좌판을 열고 하루하루를 연명했다.(그림 4) ‘고난의 행군시기’에 북한주민들이 장마당을 형성하고 조그만 장사라도 해서 입에 풀칠하는 것과 같았다. 자해하듯 무본억말 정책을 고수하던 조선왕조는 고목처럼 쓰러지고 있었지만, 민초들은 버거운 고목나무 밑에 깔려서도 끈질긴 잡초처럼 자라고 있었다. 정조와 김홍도 시대, 행상 대다수는 농업사회에서 도태된 유민들이었을 것이다.  

 

 

주찬범 향토작가 news@ihsnews.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화성신문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인기기사목록
광고
광고